포장지를 벗겨내고 털어놓는 조기유학의 계기
내년 7월이면 타지 생활도 완전히 청산이다. 나는 장고 끝 모국의 품에 안기기로 결정했고, 졸업 직후 곧장 허전한 이력서를 닥치는 대로 제출할 예정이다. 어딘가 걸리겠지 뭐. 이런 나를 좋아하는 곳이 어디든 있을 것이다.
남들과는 조금 달랐던 내 인생을 되돌아보고자 이번 연재를 시작한다. 해외생활에 환상을 가졌거나, 호기심을 가진 독자 여러분이라면 내 되짚기에 조금이라도 갈증을 덜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중학교 졸업식도 못 가고 부리나케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의 이야기. 유학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과 고뇌를 몇 줄로 추리기엔 여백이 부족하다. 간추려서 말하자면, 내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내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고, 결국에는 "살아남기 위해" 유학을 결정했다.
의미없는 이야기지만 초등학생 때까진 나름 수재였다. 받아쓰기에선 100점을 도맡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치러진 전국고사에선 올백 신화를 쓰며 야구게임을 선물 받기도 했다.
올백 정도면 게임이 아니라 게임기를 받았어야 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러운 일이다. 그 신화를 마지막으로, 나의 성적은 수직에 가까운 하락세를 거듭했다. 까놓고 세상에는 재밌는 게 너무 많았다. 공부할 땐 시간이 개미걸음이었는데 컴퓨터만 켜면 제트기를 탔다.
나이를 거듭할 수록 시험의 압박감은 늘어났다. 왜냐하면 공부를 안 했으니까. 비슷한 선상에서 출발한 내 소꿉친구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시험이 끝날 때마다 성적을 공유하던 우리였는데, 거리낌 없이 점수를 밝히던 친구와 달리 나는 항상 돌려 말하기 바빴다.
"나 이번에 90 정도 찍었는데 넌 몇점 받았냐??"
"내 평균? 하하... MVP 야구게임 박찬호 스태미너 정도?"
"(잠시 생각하더니) 78? 많이 떨어졌다 야"
그걸 또 알아채는 친구도 미친놈이었던 것 같다. 머리가 커서 교복을 입고, 노는물도 달라지며 그 간극은 좁히기 힘든 수준으로 벌어졌다. 평균은 박찬호 스태미너에서 박찬호 등번호로 추락했다. 매일이 공교육으로 시작해 사교육으로 마무리 됐고, 여가시간이라고 해봤자 하루 두 시간 정도가 전부였다. 수학 과학은 취약하니까 보충하기 위해 학원, 영어는 그나마 강하니까 더 치고 나가기 위해 학원. 기계적인 삶이었다. 호주에서 보낸 날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조이고 불안한 삶이었다. 한달 전부터 시험 준비, 시험이 끝나면 한달 숨 돌렸다가 다시 시험 준비. 방학 때는 어머니가 혹시 어디 특강이라도 등록하실까 불안. 뭐 그렇게 살았다.
한국에만 살면 몰랐겠지만, 양쪽을 겪어보니 확실히 알게 됐다. 이게 얼마나 압박이 큰 삶이었는 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미래에 대한 압박감이 조금 더 커졌다. 고등학교부터는 '실전'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그 때부터는 매일 야자하고 밤 10시에 집 간다며? 전쟁터에 내던져지는 기분이었다. 거실 컴퓨터는 이미 금지령 때문에 코드가 뽑혀 있었다.
그 때부터 나를 아끼는 어른들이 유학을 논의하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나도 모르는 새, 나의 적성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며.
압박에 시달리던 나는 매일 아침을 복통으로 시작했었다. 이게 만성이 아닌 단순 스트레스성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호주로 떠난 이후였다. 나와 한국의 상성은 최악이었다. 이 사실을 잡아내 처음 유학을 권유하신 분이 바로 중3 시절 담임선생님이었다.
그 시절 나는, 매 순간 드립을 안 치면 가시가 돋는 변태인간이었다. 아마 그런 행동거지에서 내 창의력을 발견하신 걸 지도 모르지. 학기가 시작한 3월부터, 학부모와의 만남에서 브댓이는 유학 보내야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셨다. 획일화 된 지금 교육환경에서는 재능을 살리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마침 수많은 옵션 중 하나로 유학을 고려하시던 부모님과 뜻이 맞아 떨어진 게 유학 추진의 계기였다. 1학기 성적표를 평소와 다름없이 노답으로 가져오자 어머니가 유학 카드를 들이미셨다. 아마 이걸 명분 삼아 나를 보내시려 했을 게다.
"브댓이 미국 한 번 가보지 않으련?"
나는 의외로 보수적이다. 어안이 벙벙해 뜻하지 않은 제안을 고사했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라 두려웠으며, 무엇보다 어머니가 가져온 유학 책자에서 '관리형 유학'을 운운하길래 거부감부터 생겼다. 관리 받기 싫었다.
이 놈의 보헤미안 스피릿.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리형 유학'이라고 해서 별로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쫄면 일단 빼고 보는 몹쓸 버릇 때문에, 나는 첫 제안을 그렇게 날러 버렸다.
자식의 의견을 존중해 주신 부모님 덕에, 내 유학은 더 이상 엔진을 켜지 못 하고 답보 상태에 빠졌다. 그게 다시 시동을 건 게 2학기 중간고사 직후. 당시 나와 가장 친하던 여사친이 먼저 미국 간다고 선빵을 쳤다. 흑심이 없지 않던 나는 한국에 머물겠다는 꼿꼿한 동력을 상당 부분 잃었다. 마침 성적도 더 떨어졌다. 어머니가 진지하게 네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보라고 하셨고, 나는 시험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바꿀 선택에 장고를 거듭해야 했다.
야구 플레이오프도 못 보고 고민한 결과는 예스. 다음 날 아침까지 갈팡질팡 하다가 수업 중간에 유학 보내달라고 문자를 날려버렸다.
훗날 사연을 묻는 친구들에게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왔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이대로 가면 답이 없을 것 같아서 떠난 거였다. 한국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교육제도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과외 선생님이 실제로 나를 설득할 때 이 논리를 사용하셨다. 너 이대로 떠나면 그냥 도피 밖에 안 된다고.
그러나 한 번쯤은 인생을 통째로 바꿀 강수를 두는 것이 좋아 보였다. 나는 떠나기로 했다. 유학 추진이 너무 늦어서 미국은 못 가고 호주로. 막상 과감한 결단을 내리자 그 뒤가 얼마나 불안했는 지 모른다. 출국하는 날, 화장실에 한 시간을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