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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 That Nov 19. 2018

조기유학 프롤로그 - 도피의 시작

포장지를 벗겨내고 털어놓는 조기유학의 계기

내년 7월이면 타지 생활도 완전히 청산이다. 나는 장고 끝 모국의 품에 안기기로 결정했고, 졸업 직후 곧장 허전한 이력서를 닥치는 대로 제출할 예정이다. 어딘가 걸리겠지 뭐. 이런 나를 좋아하는 곳이 어디든 있을 것이다.


남들과는 조금 달랐던 내 인생을 되돌아보고자 이번 연재를 시작한다. 해외생활에 환상을 가졌거나, 호기심을 가진 독자 여러분이라면 내 되짚기에 조금이라도 갈증을 덜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중학교 졸업식도 못 가고 부리나케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의 이야기. 유학을 시작하기까지의 과정과 고뇌를 몇 줄로 추리기엔 여백이 부족하다. 간추려서 말하자면, 내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내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고, 결국에는 "살아남기 위해" 유학을 결정했다.



한국에서의 삶


중학생인 내게 OMR 카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의미없는 이야기지만 초등학생 때까진 나름 수재였다. 받아쓰기에선 100점을 도맡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치러진 전국고사에선 올백 신화를 쓰며 야구게임을 선물 받기도 했다.


올백 정도면 게임이 아니라 게임기를 받았어야 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러운 일이다. 그 신화를 마지막으로, 나의 성적은 수직에 가까운 하락세를 거듭했다. 까놓고 세상에는 재밌는 게 너무 많았다. 공부할 땐 시간이 개미걸음이었는데 컴퓨터만 켜면 제트기를 탔다.


나이를 거듭할 수록 시험의 압박감은 늘어났다. 왜냐하면 공부를 안 했으니까. 비슷한 선상에서 출발한 내 소꿉친구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시험이 끝날 때마다 성적을 공유하던 우리였는데, 거리낌 없이 점수를 밝히던 친구와 달리 나는 항상 돌려 말하기 바빴다.


"나 이번에 90 정도 찍었는데 넌 몇점 받았냐??"

"내 평균? 하하... MVP 야구게임 박찬호 스태미너 정도?"

"(잠시 생각하더니) 78? 많이 떨어졌다 야"


그걸 또 알아채는 친구도 미친놈이었던 것 같다. 머리가 커서 교복을 입고, 노는물도 달라지며 그 간극은 좁히기 힘든 수준으로 벌어졌다. 평균은 박찬호 스태미너에서 박찬호 등번호로 추락했다. 매일이 공교육으로 시작해 사교육으로 마무리 됐고, 여가시간이라고 해봤자 하루 두 시간 정도가 전부였다. 수학 과학은 취약하니까 보충하기 위해 학원, 영어는 그나마 강하니까 더 치고 나가기 위해 학원. 기계적인 삶이었다. 호주에서 보낸 날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조이고 불안한 삶이었다. 한달 전부터 시험 준비, 시험이 끝나면 한달 숨 돌렸다가 다시 시험 준비. 방학 때는 어머니가 혹시 어디 특강이라도 등록하실까 불안. 뭐 그렇게 살았다.


한국에만 살면 몰랐겠지만, 양쪽을 겪어보니 확실히 알게 됐다. 이게 얼마나 압박이 큰 삶이었는 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미래에 대한 압박감이 조금 더 커졌다. 고등학교부터는 '실전'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그 때부터는 매일 야자하고 밤 10시에 집 간다며? 전쟁터에 내던져지는 기분이었다. 거실 컴퓨터는 이미 금지령 때문에 코드가 뽑혀 있었다.


그 때부터 나를 아끼는 어른들이 유학을 논의하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나도 모르는 새, 나의 적성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며.



일단은 막연하게, 한국 밖으로


유학을 앞둔 나는 금발들과 섞일 생각에 매일 소화불량을 일으켰다

압박에 시달리던 나는 매일 아침을 복통으로 시작했었다. 이게 만성이 아닌 단순 스트레스성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호주로 떠난 이후였다. 나와 한국의 상성은 최악이었다. 이 사실을 잡아내 처음 유학을 권유하신 분이 바로 중3 시절 담임선생님이었다.


그 시절 나는, 매 순간 드립을 안 치면 가시가 돋는 변태인간이었다. 아마 그런 행동거지에서 내 창의력을 발견하신 걸 지도 모르지. 학기가 시작한 3월부터, 학부모와의 만남에서 브댓이는 유학 보내야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셨다. 획일화 된 지금 교육환경에서는 재능을 살리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마침 수많은 옵션 중 하나로 유학을 고려하시던 부모님과 뜻이 맞아 떨어진 게 유학 추진의 계기였다. 1학기 성적표를 평소와 다름없이 노답으로 가져오자 어머니가 유학 카드를 들이미셨다. 아마 이걸 명분 삼아 나를 보내시려 했을 게다.


"브댓이 미국 한 번 가보지 않으련?"


나는 의외로 보수적이다. 어안이 벙벙해 뜻하지 않은 제안을 고사했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라 두려웠으며, 무엇보다 어머니가 가져온 유학 책자에서 '관리형 유학'을 운운하길래 거부감부터 생겼다. 관리 받기 싫었다.


이 놈의 보헤미안 스피릿.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리형 유학'이라고 해서 별로 특별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쫄면 일단 빼고 보는 몹쓸 버릇 때문에, 나는 첫 제안을 그렇게 날러 버렸다.


자식의 의견을 존중해 주신 부모님 덕에, 내 유학은 더 이상 엔진을 켜지 못 하고 답보 상태에 빠졌다. 그게 다시 시동을 건 게 2학기 중간고사 직후. 당시 나와 가장 친하던 여사친이 먼저 미국 간다고 선빵을 쳤다. 흑심이 없지 않던 나는 한국에 머물겠다는 꼿꼿한 동력을 상당 부분 잃었다. 마침 성적도 더 떨어졌다. 어머니가 진지하게 네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보라고 하셨고, 나는 시험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바꿀 선택에 장고를 거듭해야 했다.


야구 플레이오프도 못 보고 고민한 결과는 예스. 다음 날 아침까지 갈팡질팡 하다가 수업 중간에 유학 보내달라고 문자를 날려버렸다.


훗날 사연을 묻는 친구들에게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왔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이대로 가면 답이 없을 것 같아서 떠난 거였다. 한국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교육제도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과외 선생님이 실제로 나를 설득할 때 이 논리를 사용하셨다. 너 이대로 떠나면 그냥 도피 밖에 안 된다고.


그러나 한 번쯤은 인생을 통째로 바꿀 강수를 두는 것이 좋아 보였다. 나는 떠나기로 했다. 유학 추진이 너무 늦어서 미국은 못 가고 호주로. 막상 과감한 결단을 내리자 그 뒤가 얼마나 불안했는 지 모른다. 출국하는 날, 화장실에 한 시간을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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