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장애인
한쪽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밤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이 자기 복제를 한 모양이다. 늘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 사이로 또 다른 세계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만 있어줘도 어떻게 해 볼 것 같았다. 이 놈은 도대체가 제 멋대로 여서 옆에 있는 가 싶으면 어느새 밑으로 내려가 있고, 그곳에서 아예 비스듬히 눕기까지 한다. 심한 양안복시다.
혼란에 빠진 뇌는 스스로 한쪽 눈을 희생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자신의 꼬리를 먹이로 내주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말이다. 오른쪽 눈꺼풀은 돌덩이를 얹어 놓은 양 아래로 꺼진다. 이러다가 감쪽같이 봉해 지는 건 아닐까? 심장이 멈춘다고 해도 이보다 덜 무서울 듯하다.
그 무렵 회화 공부를 한답시고 미드를 반복해서 보고, 그것도 모자라 스마트 폰으로 영어 자막이 있는 영화를 서너 편씩 보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그게 무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병원으로 달려갔다. 변변한 검사 장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안과가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판이었다. 의사는 시력과 안압을 측정한 후, 동공의 움직임을 관찰하더니 근육의 문제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겠단다.
탄자니아에는 믿을 만한 안과가 없다는 ‘인터내셔널 SOS’의 추천으로 곧장 조하네스버그로 날아갔다. 그곳은 아프리카라기보다 유럽의 연장선 같다. 병원의 규모는 컸고, 의료 장비도 잘 갖춰져 있다. 검사만 하면 정확한 원인이 밝혀질 것이고, 치료 방법도 찾아질 것이라 굳게 믿었다. 다른 사람의 각막을 이식까지 하는 세월이지 않은가?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한 의사는 스테로이드를 링거로 주사했다. 이틀이 지나자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두통이 심해지고, 명치끝이 답답해 오며 복수가 찬 듯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소화불량으로 생각해 소화제와 두통약을 달라고 했다. 간호사는 약 대신 채혈 준비를 하고 나타났다. 온통 퍼렇게 멍들고 부어오른 손을 또 헤집을 모양이다. 짜증이 났다. 혈액 검사는 이미 다 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의사의 지시란다. 그제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스테로이드 부작용 테스트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다음날은 팔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은 듯 했다. 내 몸과 마음은 더 이상의 치료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소리쳤다.
퇴원을 하고, 몸을 추스른 후 내 나라로 돌아왔다.
세계의 끝, 세브란스에 왔으니 걱정 말라던 의사 선생님. 중복 검사는 피하고 몇 가지의 검사를 했다. 모세혈관의 혈액이 일시적으로 잘 돌지 못해 생긴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연회복 확률 구십 퍼센트란다. MRI 세 번에 척수검사까지 하고도 원인을 모르겠다며 스테로이드로 며칠 만에 내 몸을 초토화 시킨 의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회복을 도와주는 약을 복용하고, 양쪽 눈을 번갈아 사용하며 쉬는 게 요즘의 내 일과다. 체력이 조금씩 돌아오며 눈꺼풀에도 힘이 생기자 두 개의 세상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하나의 풍경으로 포개지는 빈도도 늘어간다.
장애는 타고 나는 것, 혹은 남의 일이란 생각에서 나도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자각이 생긴 최초의 사건이다. 일일 장애체험이란 행사를 통해서 그 불편함을 경험했다 해도, 그 절망과 두려움을 알 수는 없기에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정말 한쪽 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은 불편함을 넘어서는 공포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못 보던, 혹은 못 본 척 지나치던 사람들을 보이게 했다. 동전 바구니를 앞에 놓고 있는 할아버지, 전단지를 돌리는 할머니, 몸이 불편한 행인 등.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나도 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그리고 오감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눈 코 입 귀가 제자리에 온전히 있다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얼굴이라는 것도 함께 깨닫게 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시 보이게 했다. 팔짱을 끼고 영화를 함께 본 딸아이, 여름옷 차림의 나에게 파카를 벗어주겠다고 나서던 거리에서 만난 청년, 바쁜 일정에도 병원까지 겨울옷을 가져다주던 윤희씨, 잠시 머물 공간이 여의치 않던 내게 선뜻 집을 내준 형희씨, 먹을 것을 한보따리 들고 찾아와 푸짐한 점심을 차리던 동생,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여서 돌려보내고 싶어 하는 지인들, 뒤늦게 홀로서기 하는 나를 격려하며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 선배, 그들이 내 곁에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바깥에서 살면서 위기의 순간, 돌아올 모국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한쪽 눈으로 나는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