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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Mar 27. 2021

탄자니아 통신

한쪽 눈을 내놓을 만큼의 간절함이 있는가?

결혼하고 3년쯤 된 어느 날이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신혼 일기’라는 제목으로 원고 청탁이 들어왔는데 해보겠냐고 했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해보고 싶어졌다. 
노트 한 권을 앞에 놓고, 첫 문장과 싸움이 시작됐다.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 이야기로 시작하면 좋을 듯한데, 멋진 문장으로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야 될 것 같은 조바심 때문이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대청소를 하며 발견한 편지 뭉치로 서두를 잡았다. 첫 문장이 잡히자 수월하게 글이 써졌다. 여러 번 고치고 다듬어진 글을 남편에게 내밀었다. 전체적으로 내용은 괜찮은데 도입부가 너무 작위적이라며, 솔직하게 고쳐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솔직하게라.’ 이 글을 시작한 최초의 사건은 한 통의 전화다.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해 빛이 바래가는 편지를 찾아 읽으며, 새삼 추억에 잠겼던 상황으로 바꿨다. 글이 자연스럽고 읽기에 편했다. 
신문에 활자화되어 나온 글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글도 쓰냐고 하는 지인들의 말도 나를 들뜨게 했다. 그 낯선 느낌이 좋아 지금까지 놓지 못하고 이렇게 밤을 밝히고 있는 것이리라. 그 작은 사건을 통해, 글을 쓰는 것은 남다른 체험과 깊은 사색과 통찰력으로 무장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하고 독창적인 작업이란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좋은 글감이나 주제를 만나면 짧게 메모하는 습관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소한 일상을 나만의 느낌과 감각으로 풀어보는 연습도 했다. 점차 첫 문장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고, 생각의 흐름을 좇으며, 그 물결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게 글자로 묶어 놓았다. 편집 과정을 거치며 주제가 달라지는 일도 있었지만, 그 역시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한걸음씩 나아가다보니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인터넷이나 신문에도 꾸준히 글을 쓰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내 글이 나아지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품성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깜냥이 되는지 알고 싶어졌다. 출판사 편집장에게 두어 편의 글을 보내며, 비평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단편소설 정도 길이의 글을 기대했다는 회신이 왔다. 내 글은 점점 짧아지고 간결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간 당황했다. 
잠시 글을 배운 적이 있는데, 그 영향력이 컸다. 선생님은 자주, ‘소피아 씨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하나의 주제에만 초점을 맞춰 보세요.’ ‘지금 쓰신 글을 두 개의 글로 나눠 봐요.’ 라는 주문을 하시곤 하셨다. 스마트 폰으로 글을 읽는 시대이기 때문에 길면 지루해져 읽히지 않는다며, A4용지 반 정도로 줄이라는 말과 함께. 나 역시 너무 긴 글은 읽다가 말던 경험을 자주 한터라 그 말에 동의했다. 형용사나 부사를 최대한 줄이고 문장 역시 복문은 지양하고, 단문으로 고쳐 쓰는 연습도 병행했다. 글은 점점 군더더기가 없어졌다.
편집장의 말은 그동안의 내 글쓰기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의 주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이해력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글을 길어 올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변해갔다. 그 후, 글을 쓰는 게 다시 어려워졌다. 때론 간결하고 짧게, 때론 풍성하고 깊이 있고 길게, 왜 그렇게 자유자재의 글쓰기가 안 되는 것일까?
꽃꽂이를 하면서도 늘 느끼는 감정이다. 여백의 미를 추구하고, 선을 살리는 동양 꽃꽂이를 무척 좋아했다.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간결함을 즐겼다. 덜어낼수록 좋았다. 그러다 전례 꽃꽂이를 접하며 많이 변했다.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꽃들을 사용해 풍성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하기 때문이다. 뭐가 더 낫고 나쁜 게 아니고,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소재와 색상, 꽃의 크기를 염두에 두고 장소와 분위기 등을 고려하며 자유자재로 나를 표현해야 하는 데, 그만큼의 역량이 되지 못하는 탓이다.
얼마 전에 북유럽 신화 속의 오딘과 만났다. 그는 지혜에 목말라했다. ‘지혜의 샘물’을 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지혜의 샘에 도착해, 자신의 한쪽 눈을 바치고 그토록 원했던 지혜를 얻는다. 그러고도 모자라 ‘내세의 지혜’까지 갖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이라 여긴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는다. 9일후 다시 살아난 그는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까지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애꾸눈이 부끄러워 항상 넓은 챙을 가진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고 한다.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도 지혜다. 나는 얼마나 간절한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고 해도 지혜를 위해서라면 도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쪽 눈을 내놓진 못할 것 같다. 평생 넓은 챙 모자를 쓰고 다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험, 많은 습작만으로는 임계점을 치고 올라가기가 어렵다. 타고난 그릇이 작은 나로서는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정녕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거인의 어깨를 빌리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인가?

탄자니아에서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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