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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Feb 27. 2021

탄자니아 통신

셋째 이야기

나는 결핍된 ‘엄마 유전자’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성장 기간이 짧은 동물들이 부러웠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뱀을 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아이들 대학 입학만 하면 엄마 역할은 그만이라고 결심까지 했다. 이런 내가 싫어 결혼하지 말아야 했거나, 아이를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고 자책할 정도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성장했고, 나도 힘겹지만 나만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네 맘대로 하게 둘까 보냐는 듯, 작은 아이가 혼자만의 삶을 힘들어했다. 외로워하는 아이를 보며 성장기에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한 내 탓인 듯해서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강아지를 입양해야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하나의 생명을 책임지기로 한 것은 하나의 세계를 떠맡겠다는 것인데, 그 막중함을 알고 저러는지 싶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지인들께 자문을 구했다. 결코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을뿐더러, 수명이 인간보다 짧아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국에서 살며 포메라니온을 잠시 키웠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작은 아이는 그때도 노래를 불렀었다. 그 소리를 듣다듣다 남편이 어느 날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들어온 것이다. 갈색의 털이 긴, 우아하고 귀티가 철철 흐르는 녀석이었다. 그때는 내게 호시절이어서 살림을 맡아 주던 아주머니가 있어 나는 이의가 없었다. 내가 돌봐 주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아이와 친구가 되어 잘 지냈지만, 알러지 때문에 포기했다. 그때 아이는 상실감으로 오래 힘들어했다. 작은 아이는 유난히 어렸을 때부터 동물에 대해 각별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다 나른 병아리, 이구아나, 토끼, 누에, 달팽이 등등, 다양한 동물들을 집에 들였다. 예쁘다고 만져 대니 며칠 못 가 죽어 나갔다. 병아리 때문에 밤에 동물 병원으로 달려갔던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지나친 사랑은 폭력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할 나이였다. 지금도 병아리와 포메라니온 얘기를 하면 눈물을 글썽인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며칠을 고민했다. ‘현재가 중요하지. 미래는 미래에 맡기자.’ 무조건 시작하라고 권했다. 행동하지 않으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큰 아이는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생명을 무턱대고 입양하는 건 죄악이란다. ‘엄마는 내 딸이 더 중요해. 파양을 하더라도 우선 시작하게 할 거야.’ 라며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며칠 후 입양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우처럼 생긴 녀석이다. 짙은 회색 털을 가진, 눈 주위에 흰색 반점이 있는 암컷이다. 지극히 평범한 잡종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하더니 강아지에게도 해당이 되는 모양이다. 너무 예쁘게 생겨서 누가 데려가면 어쩌냐고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다. 아니거든, 하고 말해주고 싶은 걸 참는다. 어떤 날은 손바닥에 놓인 하얀 물건을 유치라며 보내온다. 또 어떤 날은 경쾌한 목소리로 ‘앉아. 일어서. 손 내밀어. 잘했어.’ 하는 녹음 파일을 보내온다.  아주 단호한 말투가 숙련된 조련사다. 또 어떤 날은 강아지 공원이란다. 햇살 아래를 거니는 아이 생각을 하면 온갖 걱정이 다 없어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산책도 하고 움직이라고 해도 컴퓨터 앞에 껌딱지마냥 달라붙어, 모든 생활을 온라인상에서 하던 딸아이가 변하는 게 신기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탓에 밤낮이 거꾸로 된 생활을 해오던 아이가 낮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절이라도 하고 싶다. 카톡을 통해 소식을 전해 올 때마다, 셋째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있으면서도 한국에 저당 잡힌 삶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내가 코이카 단원 생활을 할 때, 다르에스살람을 와야 할 때면 모로고로에서 활동하던 동료, 하영이네 집에 한 템포 쉬어갈 겸 들르곤 했었다. 그 당시 하영이에게 고양이를 입양했다는 소리를 들었고, 가끔 그녀석의 안부를 전해 듣곤 했었다. 도둑고양이처럼 밤이면 밤이슬을 맞고 다니던 녀석이었던지라, 저녁에 도착한 나는 그 녀석을 보지 못하고 잠들었었다. 그리고 하영이는 출근을 하고 나는 늦잠을 잤는데, 눈을 떠보니 까만 고양이가 내 머리맡에 누워,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보듯 지긋이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털을 가진 녀석이었다. 


녀석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나는, 겁내지 않고 서로 바라보기를 하며 누워있었다. 그러다 내가 몸을 돌려 눕자 바람소리조차 내지 않고 내 앞으로 다시 오더니 같은 자세로 나를 지켰다. 


지금도 그날 생각을 하면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게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된다. 고양이는 거리를 둘 줄 아는 동물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하영이는 엉엉 울며 전화를 해왔다. 한참을 통곡을 하더니 까망이가 죽었단다. 그 듬직한 녀석이 죽다니. 밤이슬을 밟으며 나가, 가끔은 동료 고양이들에게 공격을 당해 부상을 입고 들어온다더니 기어이 변을 당했구나 싶었다. 벼룩 때문에 약을 뿌렸는데 피부가 약한 까망이에게는 치명적이었고, 엄청난 고통 속에 죽어갔다고 했다.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어찌할 줄 모르고 울기만 했다. 하영이는 그 후 오래 힘들어했다. 나는 까망이를 만난 후, 고양이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변해, 내가 혹여라도 반려동물과 함께 하게 된다면 고양이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양이가 좋아한다는 캣닢.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을 먹이는 게 걸려 직접 키우기로 했다는 젊은 농부 이야기, 유기견이 많아져 입양 가족을 찾지 못한 강아지를 캐나다로 입양시키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쯤 되면 사람과 동물이 별반 차이가 없어지는 시대다. 애완동물이 사람까지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불안했었다. 사회가 부자, 부자가 키우는 애완동물, 빈자, 빈자가 키우는 애완동물로 재 계층화되는 것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사람이 사용해도 부족한 재화를 동물에게까지 덜어주면 어쩌자는 건가? 못마땅하기까지 했다. 그런 내가 요즘은 동물과 사람이 함께 직립 보행을 하며 함께 살아가는 동화 같은 세상을 상상한다. 보경스님의 ‘어느 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속의 삽화를 보며 든 생각이다. 나의 사고가 더 확대되어, 가족이 꼭 사람이어야만 하나?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아야 하는 것만이 정상인가? 함께 해서 행복하고 즐겁고 편하면 되는 거지. ‘엄마 유전인자’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고,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며,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된 듯하다.


셋째야 사랑한다.




출처: https://gcinnews.tistory.com/5708 [금천마을신문 금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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