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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센티미터의 우주

아이를 향해, 나를 향해

by 무아제로

TV 앞에 선 아이가 있다. 늘 화면 가까이에 몸을 붙인다. "뒤로 가라." 몇 번을 불러도 듣지 않는다. 나는 처음에는 시력을 걱정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건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이에게 그 자리는 세상과 더 가까워지는 자리다. 30센티미터의 거리가 아니라, 0센티미터의 몰입이 필요한 것이다.


아이의 뇌는 아직 충동을 다스리는 전전두엽이 덜 자라 있고, 대신 편도체와 도파민 회로는 즉각적인 자극에 예민하다. 멀리서도 보인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더 가까이 다가가야만 화면 속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몰입이 아이에게는 작은 쾌락이자 확실한 보상이다. 아이는 화면을 보는 게 아니라, 화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장자를 떠올린다. 호접지몽.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 너무도 자유롭고 즐거워서 자신이 사람이라는 걸 잊었다. 깨어나서야 물었다.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나를 꿈꾸고 있는 것인가?" 아이에게 TV 화면은 나비의 꿈과 같다. 화면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그 속으로 스며드는 방식으로 세계와 연결된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말했다. 동굴 안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보며 산다. 그들에게 그림자는 허상이 아니다. 그것이 전부인 세계다. 아이에게도 화면은 허상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가장 선명한 세계다. 어른은 안다. 화면은 실재가 아니라 재현이라는 것을. 저 세계는 픽셀로 만들어진 허상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이는 아직 모른다. 아니, 알 필요가 없다. 아이에게 중요한 건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생생하게 느껴지느냐다.


그렇기에 억지로 끌어내린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몰입은 막히면 반발로 돌아오고, 통제는 더 강한 집착을 낳는다. "뒤로 가라"고 말할수록 아이는 더 앞으로 나간다. 금지는 욕망을 키운다. 억압은 집착을 낳는다. 방법은 다른 데 있다. 몰입을 끊는 것이 아니라 몰입을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것. 조금 뒤에서 앉아도 보인다는 걸 스스로 발견하게 하거나, 화면에서 본 장면을 그림으로 이어가게 하는 일. 혼자 화면 속에 잠기지 않고, 함께 보는 경험을 쌓게 하는 일. 그때 아이의 몰입은 화면에서 벗어나, 세상과의 새로운 연결로 확장된다.


나는 묻는다. 나는 정말 아이를 멀리 앉히려 하는가, 아니면 아이가 멀리 보기를 바라는가. 화면의 거리만이 아니라 삶의 거리까지.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사유의 거리. 아이는 지금 화면에 붙어 있다. 하지만 언젠가 아이는 화면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 "언젠가"를 앞당기려고 지금 억지로 뗄 필요는 없다. 대신, 아이 스스로 거리를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게 진짜 거리다.


아이의 고집은 나에게 말한다. 돌봄은 실험의 설계도가 아니라 몰입의 방향을 바꾸는 예술이라고. 사회복지조사론 교재에서 읽었다. 자극과 반응, 강화와 소거, 기초선과 개입. 그 모든 게 맞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동시설의 하루는 작은 우주다. 아이 하나의 몰입과 고집은 통계보다 더 큰 진실이다.


나는 그 옆에서, 또 다른 기초선을 기록한다. 아이를 향해, 동시에 나를 향해. 아이가 TV에 붙을 때 나는 무엇에 붙어 있는가. "이래야 한다"는 신념에,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는 의심에. 아이가 화면 속으로 들어가듯, 나는 내 생각 속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 이제는 아이를 끌어내려 하기 전에 나를 먼저 끌어내야 한다. "이래야 한다"는 틀에서, "이렇게도 될 수 있다"는 열림으로. 하지만 쉽지 않다. 오랜 전통의 교육 방식과 시설의 방침이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아이를 너무 자유롭게 두면 안 된다."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면 버릇이 없어진다." 내 방식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비판적이다. 너무 느슨하다고, 너무 원칙이 없다고.


그럼에도 나는 안다. 아이가 TV 앞에 붙어 있을 때 나는 더 이상 "뒤로 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지금 뭐 보고 있어?" 그리고 아이 옆에 앉는다. 함께 보는 것. 그게 거리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별거 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안다. 아이들만은 나를 기다린다.


돌봄은 통제가 아니라 동행이다. 아이를 바꾸려 하지 않고 아이와 함께 변화하는 것. 아이를 끌어내려 하지 않고 아이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되, 그 옆에서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 TV 화면 말고도 세상에는 몰입할 게 많다는 것을. 그림, 책, 놀이, 대화, 햇빛, 바람. 화면보다 더 선명한 세계가 밖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말로 가르칠 수는 없다. 아이는 경험으로만 배운다. 그러니 나는 화면 옆에 다른 세계를 펼쳐놓을 뿐이다. 색연필, 도화지, 블록, 책. 그리고 기다린다. 아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TV 앞 30센티미터. 그 거리는 아이의 우주이자 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아이는 화면에 붙고 나는 기준에 붙는다. 아이는 몰입하고 나는 집착한다. 아이는 세계를 만들고 나는 문제를 만든다. 그러니 이제는 아이를 바꾸려 하기보다 나의 시선을 바꾸는 것. "문제 행동"이 아니라 "몰입의 방식"으로, "고집"이 아니라 "자기만의 리듬"으로,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존재"로.


아동시설의 하루는 작은 우주다. 그 우주 안에서 아이는 자기만의 별을 만들고, 나는 그 옆에서 또 다른 별을 기록한다. 아이를 향해, 동시에 나를 향해.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거리를 배워간다. 화면과의 거리, 세상과의 거리, 나 자신과의 거리. 그 거리가 확보될 때 비로소 진짜 연결이 시작된다. 붙어 있지 않아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오늘도 아이는 화면에 붙어 있다. 나는 더 이상 "뒤로 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옆에 앉아서 묻는다. "지금 뭐 보고 있어?" 그리고 함께 본다. 아이의 세계를, 나의 한계를, 우리의 거리를. 내 방식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돌봄은 완벽이 아니라 과정이다. 매일 조금씩 배워가는 것. 아이를 향해, 동시에 나를 향해. 그렇게, 우리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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