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동의 나, 고요의 나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by 무아제로


나는 언제부터 '나'였을까.

몸이 생긴 순간, 의식이 깨어난 순간, 아니면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처음 붙잡았던 그 순간.


양자역학은 이렇게 속삭인다. 모든 입자는 측정되기 전까지 무수한 가능성으로 떠돈다고.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 역시 관찰되기 전에는—병원에 있는 나, 집에서 쉬는 나, 웃는 나, 우는 나—그 모든 버전으로 동시에 진동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기'를 인식하는 순간, 그 무한의 떨림은 한 점으로 수축된다. 관찰은 현실을 확정하고, 그 확정은 다른 가능성들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는다.


불교는 같은 이야기를 다른 언어로 펼친다. 한 마음이 일어나면 온 세계가 생기고, 그 마음이 멈추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즉 '나'는 내 의식이 던진 첫 번째 파문이다. 내가 '있다'고 느끼는 순간, 세상도 나를 따라 윤곽을 드러낸다.


그러나 세계는 한 방향으로만 열리지 않는다.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처럼, 내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진실의 형태는 달라진다. 한쪽에서는 명확해 보이던 것이, 90도 돌리면 다시 흐릿해진다. 진실은 단 하나의 점이 아니라, 무수한 방향으로 뻗은 떨림으로 존재한다. 보는 눈이 바뀌면 세상도 따라 흔들린다.


이제 나는 안다. 내 몸을 이루는 전자 하나조차 세상 어딘가에서 미세한 파동으로 번져 있다는 것을. 내 손끝은 공기와, 공기는 별빛과, 별빛은 또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나의 경계를 벗어나 이미 세계와 얽혀 있는 존재다. 양자 얽힘은 그 물리적 증거이자, 연기(緣起)가 그려낸 마음의 지도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를 아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어쩌면 단순하다. 세상은 나의 파동을 통해 나타나므로, 나는 내 파동을 맑게 해야 한다. 말 한마디가 진동이 되고, 그 진동이 타인의 마음에서 또다른 물결로 번진다. 내가 부드러우면 세상도 잔잔해지고, 내가 거칠면 세상도 출렁인다. 관찰이 현실을 만든다면, 온화한 관찰이 온화한 현실을 빚는다.


이제 나는 이해한다. 삶은 서로 다른 입자들이 충돌하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의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파동들의 춤이라는 것을. 그 춤 속에서 나는 때로 고요하고, 때로 요동친다. 그러나 바다는 변하지 않는다. 그 바다—공(空)이라 불리는 무한의 자리—는 모든 파동을 품은 채 침묵하고 있다.


나는 그 바다 위의 하나의 무늬다. 그러나 동시에, 바다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양자와 불교가 함께 가리키는 방향, 즉 "분리된 나"가 아니라 "연결된 나"로 사는 삶이다.


오늘도 나는 그 진동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른다. 누군가 내 안의 파동을 느끼고, 그 파동이 또다른 생명에게 닿아 작은 울림을 만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하나됨은 융합이 아니라 간격의 이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