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사이에서 아이의 얼굴을 읽다
공부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속도를 묻는다. 하루에 몇 문제를 푸는지, 몇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는지. 시험 앞에서 필요한 것은 독기라 말한다. 이를 악물고 달려야 한다고. 생각은 줄이고 손을 빠르게 움직이라고. 맞는 말이다. 시험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골라낸다.
그런데 어떤 날은, 책상 위에 문제집을 펴놓고도 한 장을 넘기지 못한다. 쉬는 날인데도 고작 다섯 문제 앞에서 발이 묶인다. 정답이 헷갈려서가 아니라, 문장 하나가 자꾸 다른 얼굴을 데려오기 때문이다. 이 이론이, 이 개념이, 마주한 아이의 말 없는 눈빛과 어디쯤 이어져 있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손이 멈춘다.
효율적이지 못한 공부다. 아마 누군가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렇게 공부해서 언제 시험을 보겠느냐고. 하지만 사회복지를 공부한다는 건 애초에 효율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일이다. 이 학문은 정답보다 사연이 많고, 결론보다 과정이 길다. 무엇보다 사람을 다룬다. 종이 위의 문장이 아니라, 오늘도 숨 쉬고 다치고 버텨내는 인간을.
에릭슨의 발달단계라는 말은 단정하다. 질서가 있고 순서가 있다. 그러나 그 단정한 문장 사이에서 자꾸 어긋난 계절들이 보인다. 제때 오지 않은 봄, 충분히 머물지 못한 여름. 사랑을 받았어야 할 시기에 사랑 대신 긴장을 배운 아이들.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읽다가, 낮에 본 아이의 입술을 떠올린다. 늘 거칠고 자주 트는 입술. 반항적인 말투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오래 참은 사람의 표정이다. 이론은 설명하지만, 아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이는 늘 이론보다 조금 늦게 따라온다.
지식은 외우면 된다. 하지만 결핍은 외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감각에 가깝다. 다섯 문제를 붙잡고 있는 동안, 머리는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아이의 삶이라는 화면에서, 이미 덧칠된 어두운 색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덜 아프게 바꿀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겹치지 않게, 다시 칠하는 일.
이론은 말한다. 상처는 다른 경험을 통해 수정될 수 있다고. 그 문장은 간단하지만, 실행은 어렵다. 아이가 실수했을 때 화내지 않는 일. 예상된 반응 대신, 한 박자 늦춰 “괜찮아”라고 말하는 일. 그 사소한 어긋남 하나가, 아이에게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일.
이건 독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다. 속도를 내겠다는 결심보다는, 함께 늦어질 수 있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성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자리를 지키는 일, 당장 달라지지 않는 아이 앞에서 조급해지지 않는 일. 다섯 문제밖에 풀지 못했다는 자책은, 사실 다섯 명의 아이 앞에서 함부로 서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공부의 목적이 자격증이라면, 오늘의 진도는 초라하다. 하지만 공부의 목적이 ‘조금 덜 상처 주는 어른’이 되는 데 있다면, 이 하루는 헛되지 않다. 머리로 외운 문장은 잊히지만, 가슴으로 머문 문장은 현장에서 다시 살아난다. 아이 앞에서 목소리를 낮추는 순간, 기다리는 시간을 늘리는 순간, 그 문장들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느리다고 해서 멈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천천히 걷는 사람만이 발밑의 감촉을 안다. 땅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씨앗의 기척을, 먼저 느낀다.
지금 시험을 늦추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계절을 조금 앞당기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