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셋 너머의 말들

아동양육시설 중학생들이 부모 욕을 하는 이유에 대하여

by 온화수

헤드셋의 불빛이 점멸하면 아이들은 조금 달라진다. 낮 동안 조용하던 아이들이 밤의 모니터 앞에서는 날 선 공격수가 된다. 말은 생각의 통로를 거치기도 전에 입술 밖으로 빠르게 튀어나온다.


그 소란 속에서 유독 귀에 걸리는 파편들이 있다.

“느금마.” “애미 뒤O 새끼.”


문장의 의미를 곱씹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설명이라기보다 금속성 소음에 가깝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 가장 무른 곳을 먼저 짓이기겠다는 원초적인 신호일 뿐이다.


아동양육시설(보육원)에서 일하다 보면 아이들의 말이 언제부터 멍드는지 알게 된다. 초등학생 때 아이들은 자기 상황을 해석하기보다 견디는 쪽에 가깝다. 오늘 메뉴가 무엇인지, 누가 먼저 씻는지, 남은 게임 시간이 몇 분인지가 세상의 전부다. 생각은 얕고 생활은 빠르다.


그래서 부모의 부재도 처음에는 질문이 되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 없는 날씨처럼, 그 결핍은 그냥 아이들 곁에 가만히 머문다.


그러다 아이들끼리 있을 때 불쑥 이런 말이 고인다.

“우린 엄마 아빠 없잖아?”


여덟 살 아이도 그 말의 무게를 이미 안다. 정리해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결로 체득한 것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다 알고, 알고 있으면서도 묻지 않는 방식으로 제 몫의 그늘을 보존한다.


중학생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몸이 먼저 자라고 감정은 그 속도를 겨우 따라온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앞이 아니라 자꾸만 제 등 뒤의 허공을 돌아본다.


'왜 나는 여기 있지.'

'왜 우리 집은 이 모양이지.'

'여기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존재 같지.'


이 질문들은 제대로 된 문장이 되기 전에 독한 욕설이 되어 발화한다. 그 화살촉은 대개 부모를 향한다. 흥미로운 점은, 부모가 없는 아이만 그런 욕을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명절마다 찾아오는 부모가 있든, 방학마다 원가정에 가든, 그들에게 부모는 존재 자체로 이미 상처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욕은 공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릿한 고백에 가깝다. 말로 정리하지 못한 슬픔이 가장 거친 형태로 분출되는 것이다. 타인의 부모를 욕하면서 아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재를 확인하고 원망을 쏟아내며, 내가 아직 이렇게나 아프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가여운 방식이다.


물론 지도는 필요하다. 그런 말은 쓰지 않아야 한다. 그건 분명하다. 다만 그 말이 왜 나왔는지는 조금 늦게 생각해도 괜찮다.


아이들은 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아픔을 숨기는 법을 먼저 배운다. 그러다 중학생쯤 되면 숨겨둔 것들이 비로소 언어를 찾아 비명을 지른다. 그 언어가 하필 욕설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들릴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아, 이 아이는 아직 제 이야기를 설명할 문장을 찾지 못했구나.’


헤드셋을 벗으면 아이들은 다시 무해한 고요로 돌아온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컵라면 국물을 마시고 이불 속으로 발을 집어넣는다. 가시 돋친 말과 여린 마음을 같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나이. 중학생은 늘 그렇다.


어른의 역할은 그 주머니를 억지로 뒤집어 검열하는 게 아니라, 무게를 견디지 못해 터지지 않도록 곁에서 가만히 자리를 잡아주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