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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첫여름>, 나는 듯 가벼운 노년

by Agnes

나이가 들면 비슷해진다고 했다.


허리는 구부정하고 팔다리는 가늘다. 아주 많이 나이가 들면 염색도 파마도 안 하게 되어서 그저 짧은 커트머리가 된다. 할머니, 할아버지 할 것 없이 모두 회색빛 커트 머리다. 손가락은 뭉툭해지고 피부는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처럼 건조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했고 할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런 모습들이 내 눈에도 보였다. 시어머니는 어느 순간 파마를 안 하셨고 머리는 점점 더 짧아져갔다.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노인들은 모두 회색빛 커트 머리였다. 아빠의 손끝이 뭉툭하다. 엄마의 다리가 자꾸 가늘어진다. 나도 언젠가 비슷한 모습의 노인이 될 것이다.


허진 배우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내가 본 영화 <첫여름>의 첫 장면이었다. 달빛인지 가로등빛인지 모를 빛이 벽에 어른 거리고 배우는 약간 웨이브진 단발머리를 벽에 비빈다. 슬립 차림으로 벽에 기대어 남자 친구와 조곤조곤 고요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고혹적이다.


다른 장면에서 배우는 춤을 춘다. 가슴에는 화려한 나비 브로치를 달고 머리에는 나비핀을 꽂고 화려한 녹색 드레스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었다. 나이 든 몸에 진한 화장과 화려한 구두, 화려한 드레스가 언발란스하지만 잘 어울린다. 더운 나라 어딘가, 스페인의 어느 클럽인 것만 같다. 자유분방하다.


이번엔 한복을 입고 산을 오른다. 남자친구의 49재에 가기 위해 전투적으로 산을 오른 후, 홀로 앉아 절밥을 먹는다. 마냥 구슬픈 울음 그런 것은 없다. 무심하게 식사를 한다. 당당하다.


남편을 돌보는 장면에서는 영낙없이 돌봄에 지친 나이 든 여성 노인이다. 남편의 속옷을 빨고 휠체어를 민다. 휠체어를 미는 일이 힘에 부치고 땀이 줄줄 흐른다. 늙었고 고단하다.


제작 발표회에 나선 배우는 이번엔 배우의 모습이다. 아이보리색 모자에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고 감독과의 첫 만남에 대해 말한다. 존경하고픈 어른의 모습이다. 자신의 일에 대해 애정을 갖고 말한다.


영화 속 허진 배우는 장면 장면마다 모두 다른 얼굴이었다.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본 한 노인의 일상은 모두 달랐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장면 속에 있느냐에 따라 다른 노년이 된다. 비슷한 노인도 없고 뻔한 노인도 없다. 노년은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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