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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단 Dec 15. 2015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문학동네 연말리뷰 결산대회

   타서는 안 될 배였다. -박민규<눈먼 자들의 국가>

   그렇다. 박민규 작가의 말대로 그 배는 타서는 안 될 배였다. 세월호 희생자들은 배에 오르는 그 날, 그 배가 민주시민사회에 있어서 부끄러운 모순의 총화라는 것을, 그 모순의 총화가 국민의 눈앞에서 확인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이 그 부조리의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들릴 것이라고는,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언론이 국민을 기만할 것이라고는, 그리고 절대 잊지 않겠다던 다짐을 국민이 잊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우리는 배와 함께 희생자와 진실이 가라앉는 장면을 생중계로 목격했다. 안전하다고 애써 믿어왔던 대한민국이 부조리의 총화임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국민은 큰 충격에 빠졌고, sns와 카카오톡에 노란 물결을 그리며 가라앉는 이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하지만 이 나라에 그런 기도는 통하지 않았다.

   모두는 2014년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이 변할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믿음이 없었다. 진실이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그 결과, 코끼리를 보지 못하고 다리만 만진 이와 코만 만진 이가 말이 다르듯, 모두가 다른 말을 했다. 결국 세월호는 누군가에겐 '사고'로, 누군가에겐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진실'이라는 실체에 다가갈 수 없었고, 우리가 가닿은 진실은 서로 모습이 많이 달랐다. 우리는 이 어정쩡한 퍼즐 조각을 맞추며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그리곤 지금껏 확실하다 믿었던 것들을 다시 의심해야 했다.

   그것은 얼마 전에 읽은 책, '불타버린 지도'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나임을 확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개인들이 길을 잃고 마는, 확실한 이정표가 그려져 있다고 믿었던 지도가 정신을 차려보니 불타고 있는 현실. 세월호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밟고 있는 땅 위가 안전한 지표인지, 이 지도가 제대로 된 것인지, '나'라는 인간은 정말 이 세상에서 확실한 존재인 것인지 다시 확인해야 했고, 그 어느 것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결국 이 낯익은 감각도 실은 진정한 기억이 아니라 아주 그럴듯하게 위장된 가짜 기시감에 불과하다면...... 내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판단 역시 기시감을 합리화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나 자신조차 이미 나라고 부를 수 없는 의심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p.295<불타버린 지도>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거리로 나왔다. 시민들은 그들을 위해 박수쳤고, 그 걸음이 멈추지 않기를 바랬다. 부서지고 흩어져가는 지도 위에 흔적 하나 남길 수 없는 우리들은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것은 그들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정부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아야만 모두가 안심하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좌표를 지도 위에 그려 넣을 수 있다고, 불타지 않은 온전한 지도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그 소중한 목숨이, 그 귀중한 진실이 수장된 것인데도 정부는 희생자와 함께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국민이 이뤄낸 민주시민사회가 수장되었다. 이 나라에 '민주주의'는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민간잠수부의 투입도 저지하고, 해경도 나서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는 무엇도 하지 않았던 정부. 그것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보상은 없었고, 언론을 조작하느라 바빴고, 희생자와 유가족을 외면하기에 바빴다. 그렇다. 유가족은 차디찬 거리 위에서 외면당했다. 정부의 사람들은 세금을 운운하며 세월호 참사에 돈을 쏟는 것이 비상식적인 일인 것처럼 몰아갔다. 야당은 무능했다. 당파싸움과 정치인들의 기만 속에서 이 사회의 소중한 '개인'은 없었다. 희생자와 유가족은 그저 성가신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집단에, 그들의 뇌 속에 국민으로서의 '개인', 민주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개인'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국민은 정치집단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다가도, 여론이 정치에 의해 변해가는 양상을 보며 자신들의 생각을 바꿨다. 세월호 참사는 진보와 보수의 진영논리로 변했다. 사람들은 불안한 지도를 손에 쥐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정치인과 더불어 희생자와 유가족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시민'으로서 외면해선 안 될 것들을 언급하는 이들은 종북으로 몰려야 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희생된 개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가 공유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분명히 서로 대화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모든 비본질적인 논쟁은 치우고, 한 가지 질문에 집중하자. 딸아이를 그렇게 잃은 아비가 스스로 죽어가는 것을 무심히 같이 지켜보기만 한 후 이 사회는 더 이상 '사회'로서 존립할 수 있을까. -p.151<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판사님. '모든 비본질적인 논쟁을 치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게 맞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에, 아니 이곳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싶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해할 수 없게도 지금까지 좌우논리에 치우쳐 합리적인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사회는 '사회'라 언급하기도 힘든 모습인 것입니다. 판사님이 강조하신 합리적인 개인주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목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지만, 들려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 뿐. 판사님. '개인'이라는 귀중한 존재들을 돌아보지 않는 이 나라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세월호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느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기 꺼려할 것이다. 불편하니까. 현실을 외면해야 하는데 그것을 끄집어 올리는 일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다니, 종북이로군, 연민이라는 감정에 기대어 희생자를 팔아먹는 유가족을 어떻게 옹호하느냔 말이야 하고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은 세월호에 피로감을 느끼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 것이다. 불타버린 지도 위에. '개인'으로 서 있다 믿으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나라에 개인이 아니다. 온전한 지도를 손에 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편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희생자에 관련된 글을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나는 아마 인간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랬기에, 이렇게 외면하는 인간의 모습에 실망을 느낀 것 같고, 자기기만하는 인간의 모습에 분노하는 것 같다. 차디찬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 현실을 떠올릴 때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국민에게 세월호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고 싶다 했지만, 사실 나는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나도 어느 정도 잊고 있었다. 분노하며 키보드 앞에 앉았으나 관성처럼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것이 있는 법이다.

   더 나은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만과 냉소가 아닌, 분노, 온기, 사랑, 그리고 기억일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장편소설 '지평'에서 주인공이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결국 그녀와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기억하는 일이다. 잊지 말자던 다짐을 떠올리고, 우리에게 일어났던 믿을 수 없는 사건을 기억하는, 희생자와 유가족의 눈물을 기억하는 일 말이다.

   지금도 유가족은 진실을 찾기 위해 거리 위를 걷고 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그들의 질문에 응당 답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껏 온전한 그림을 그려왔다고 믿었다. 그 그림은 훌륭하다고, 어긋나는 부분은 그것대로 괜찮다고 믿은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알고 있다. 그 그림은 일그러진 자화상이라는 걸. 그러니 캔버스에 다시 칠을 해야 한다. 일그러진 자화상을 두고, 그들의 질문을 두고 가만히 있는 건 말 그대로 '미개'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켜보겠다. 기억하겠다. 그리고, 답하겠다. 붓을 거두고 캔버스 위에 다시 칠을 하겠다. 온 국민이 그렇게 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모두가 온전한 지도 위에서 다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점한 아름다움을 믿겠다. 그러니 누구든 응답하라.
  이내 답신을 달라. -황정은<가까스로 인간>



문학동네에서 진행한 연말리뷰결산대회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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