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소비가 된 것 같기도해요. 스우파 말입니다. 춤을 추는 8팀의 사람들이 나와 갑자기 대한민국을 뒤흔들어 놓았어요. 인스타그램을 켜도, 어떤 TV프로그램을 봐도, 그들이 나옵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너무 멋있다고 이야기해요. 분명 1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어우 꼭 저렇게 까지해야돼?’라고 경계하면서 우리는 이윽고 중독되어 버렸죠. 그게 바로 Mnet이 잘한다는 악마의 편집일까요?
아무튼 올해는 분명 스우파의 해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back dancer’가 아니라 ‘dancer’로서 보게 됐으니까요. 연예인보다 더 우리를 흥분시키는 실력자들. 우리와 같이 일상의 나날들을 살고 있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미친듯한 광기, 에너지, 그리고 진심을 우리는 보았으니까요.
춤이라는 건 어쩌면 참 제한적인 매개입니다. 그림처럼 누군가한테 팔 수도 없고, 음악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틀어놓을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에요. 오로지 움직임으로만 남을 수 있는 것. 한 번 추고나면 휘발되어 버리는 것. 다시 똑같을 수 없는 것이죠.
오랜 시간 동안 연기는 녹화로 기록되어, 콘텐츠화되고, 유통되고, 재방되기를 반복했지만 어느하나 ‘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저스트절크와 립제이에 필적할 YOONJI 등 몇몇 댄서를 오랫동안 유튜브로 지켜봐온 사람은, 아마도 음악을 듣는 사람에 비하면 극소수였겠죠.
아무튼 이런 움직임이 참 반갑기는 합니다. 춤을 추는 사람들은 아마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거에요. 춤에 대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면, 음악은 되는데 왜 춤은 안되는지에 대해, 춤의 무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땀과 노력이 너무나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해, 음악에 ‘곁들이는’ 춤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언제나 아쉬움이 있어왔죠.
몸짓으로 지금까지 사랑을 받아온 유명한사람들도 있습니다. 독일의 현대무용수 피나 바우쉬나 발레리나 강수진처럼요. 하지만 힙합댄서나,왁커나, 재즈댄서나, 스포츠댄서나, 혹은 한국무용수중에 기억남는 사람있나요? 우리가 음악의 저변을 넓혀 ‘인디’라고 부르고, 선우정아와, 새소년을 듣는 것과는 조금 달라요.
저변에서도, 춤은 소비자가 크지 않은 영역이 분명했습니다.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이윽고 떨어져 나간 것은 그 시장에서 먹고살기가 분명, 어려웠기 때문이죠. 제 얘기를 하려던 것은아니지만, 저 역시 그런 저런 이유로 ‘춤’이 아니라 ‘축제’를 선택했고, CJ ENM 와 HYBE같은 선택한 것이 분명 어떤 댄서에게는 타협하는 인간으로 보였으리라는 것을, 피해갈 방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 말은 제가 인생에서 체험한 몇 안되는 깨달음 중에 하나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해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아무튼 확실하게. 어떤 종류든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필요로 했던 용기는,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세전 120만원 월급받는 비영리 축제조직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좋은 대기업도 아니었지만, 120만원은 분명 엄청나게 나쁜 보수였기때문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건, 실은 아버지의 영향도 컸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스물넷의 일입니다.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것은 정말 찰나의 사고였고, 그래서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분명 아빠가, 그날이 당신의 마지막 날인 줄 알았더라면 저에게 전화 한 통 했으리라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하지 못했어요,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갑자기 무거워져서 죄송합니다만, 내일을 장담하는 것은 얼마나 교만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생이 무한함을 나는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저는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그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축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스우파 얘기를 꺼내버려, 거짓말이 탄로나게되었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춤을 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춤추는 사람 마음 다 똑같겠지만, 저의 춤사랑은 말도 못해요. 여섯살적 유치원에서 잠시잠깐 발레를 배웠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엄마에게 발레학원에 등록해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안된다기에 책상 밑에 들어가 엉엉 울며 하루종일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초등학생이 됐을무렵엔 구슬기라는 성인식을 잘 추는 한 아이가 동영상으로 화제였습니다. 그때 거울을 보며 암웨이브를 연습하게 되었죠. 그무렵 박진영의 99% 영재육성 오디션과 SM에서 주말마다 펼쳐지던 공개오디션에도 참여했죠. SM오디션은 판당고라는 웹사이트에 영상이 올라가고, 네티즌들이 투표를 하는 (지금생각해보면) 굉장히 앞서가는 투표 시스템을 도입했는데요, 월말 2위를 하며 안타깝게 연말 오디션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는 밀리오레의 시대기도 했어요. 동대문과 명동에 있는 밀리오레에서 주말이면 어김없이 댄스경연대회를 했죠. 그때는 아마 중학생이었을 겁니다. 저는 거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여를 했어요. 한 번은 우승도 했는데 ‘F학점의 천재들’이라는 대회였습니다. 그 때 명동가를 지나가면 각종 신생기획사들이 주는 명함도 많이 받았더랬죠.
그런 것들이 추억으로만 남게된 것은, 아무튼 제가 어느 한 기획사에 자리잡고 성장할만큼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않았고, 어쩌면 실력이 모자랐거나, 혹은 그저 운명이 아니어서일지도 몰라요. 그런것들일랑 깔끔하게 접고, 공부를 매진하기로 결심했죠. 이후 나름 가고 싶었던 대학교에 갔는데, 합격하고 처음 한 일은 역시나 댄스동아리에 가입한 일이었습니다. 욕심이 있어서, 기장도 달았더랬죠.
아무튼 돌이켜 제 스스로에게 가장 사과해야할 일이 있다면 10대에 좋아하는 일을 더 용기내지 못한 것입니다. 배고파도, 자신없어도, 좀 더 할걸. 그런 깜냥을 가지기에 저는 용기도 없었고, 공부가 아니면 도저히 삶을 타개할 성공의 주춧돌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댄서로서 성공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 언저리에서, 돌다가 돌다가. 축제를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스우파에서 댄서들과 한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는 말이 있어요. 진짜 먹고살기 힘들고, 불안정했다고. 그 때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스우파에 나왔다고. 저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삶의 진짜 달콤한 행복은, 진짜 짜증나지만 어쩌면, 그 고개를 거의 다 견뎌내는 사람에게 오는 것 같아요.
포기하려고 할 때, 마지막 한 발짝. 진짜 빡칠 때, 한 번의 인내.
결국 거의 다 와서 터져버리는 감정처럼, 모든 결실도 거의 다 왔을 때, 조금 더 익기를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것. 같더라구요. 안 궁금하실테지만, 저는 지금까지 이런 행사들을 기획해왔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서울세계무용축제. KCON(케이콘, 한국에선 별로 안유명한 세계최대 한류 페스티벌) 멕시코, 뉴욕, 엘에이 프랑스, 재팬 등 대략 열 여섯 번, 아시아 최대 음악시상식 MAMA 다섯 번, 그리고 첫번째 개최 준비 중인 위버스콘.
축제를 정말 좋아하냐구요? 춤이라는걸 직업으로 삼지 못한 건 아마 평생의 한이 될거에요. 하지만 축제를 기획하는 일을 분명, 누구보다 치열하게 하고있긴 합니다. 재밌다고만은 말을 못하겠지만, 문화를 매개로 기획하는 일,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간, 문화와 예술, 사람과 사람의 연결. 잠깐의 콘텐츠에서 터져나올 수 있는 에너지, 영감. 그런것들을 좋아하는건 분명해요.
아무튼, 춤만한 사랑은 아닌 것 같아요. 영어 이름을 피나로 지은건, 피나 바우쉬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내심 그런 의도도 있었다는 걸. 그래서 발레를 다시 시작한 지는 3개월이 되었다는 걸, 어떤 형태로든 그 시절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걸. 생각할 때면요. 그러니, 다시 정말 좋아하는 일이 내게 찾아오면.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 언저리에서 일하고 있는건, 축제 하나로 족해요.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용기를 다시 낼 거라면, 그 때는 정말 주인공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