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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곤지 Oct 24. 2022

육아(兒)아닌, 육아(育我)휴직을 시작합니다

어느 날, 덜컥 나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일만 해왔지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네요

꽤 오랜 기간 직장을 그만두고 쉬는 시간을 가져봤다는 동료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8년차라는 연차가 쌓일동안 이직은 3번 경험했지만 온전한 '쉼'의 시간이 얼마나 있었을까. 짧은 휴가의 달콤함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나에 대해서 더 깊이 탐구해볼 시간. '나'라는 사람을 꼭 긴 호흡의 쉼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지만, 사람은 환경을 바꾸고 시간을 바꿔야만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직감했다. 지금 이 시점은 '나'를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여기 아기집 보이시죠?
임신인 것 같네요.
2주 뒤에 다시 와보세요.


서른, 어느 날 덜컥 나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내가 계획했거나 원하는 곳도 아니었고, 어떻게 인연이 닿게 된 곳들이었다. 그동안 3곳의 회사를 거쳤다. 스타트업 두 곳과 한 중견기업의 신사업팀. 3곳의 공통점은 맨 땅에 헤딩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내야 했다. 


매일 매일이 새롭고, 지금 당장 주어진 미션을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일단 실행해봐야 하는 환경.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8년차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2번의 이직텀이 있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직장을 옮겼으니, 꽉 찬 경력으로 채운 지난 8년이었다.


빡빡한 과정 가운데 결혼도 일처럼 했다.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사람과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그냥 스타트업처럼 거침없이 해버렸다. 스프레드시트에 해야 할 일을 주르륵 나열하고, 하나씩 쳐내려가다보니 4개월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준비 기간에는 아침에는 운동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결혼 준비를 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회사의 To do list가 가득했던 것처럼, 나만의 To do list도 항상 꽉 차 있었다. 결혼을 하고 이제 좀 삶의 안정을 찾는가 싶었는데 어느날 덜컥 나는 '엄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너도 성격 급한 엄마를 꼭 닮아있구나.) 



왠지 모르게 찬 공기가 느껴졌던 병원


정신없이 지나가던 서른의 겨울, 나에게 와준 아기 천사는

서른 하나의 여름, 그렇게 나에게 와주었다.

뱃속에서 9개월을 넘게 품고 있었다고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아직은 덜 된 채로 엄마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내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내 인생 하나도 책임지지 못하는데
내가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까



다급하게 돌아가던 분만의 시간을 보내고.

갓 나온 핏덩이를 안았을 때 울컥- 감동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아이, 우리의 삶에 대한 불안이 올라온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이 핏덩이같이 소중한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기를 조심히 불러보았다.

"이레야, 엄마야."


2022년의 여름,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작디 작은 너의 발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흘렀다. '아이를 키운다'라는 의미의 육아(育兒)의 시간과 함께 '나 자신도 성장'하는 육아(育我)의 순간들을 요즘 보내고 있다.


집에서 아기가 하루종일 하는 건 먹고, 자고, 놀고, 싸고...지극히 생존과 본능에 충실한 삶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부모가 되어버린 
나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고차원 자기성장의 시간들을 보낸다. 밖에도 자유롭게 나가지 못하고 집에만 있지만, 인생의 어느 때보다도 바쁜 일상을 살아간다.


고작 한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길과 돌봄, 사랑이 필요한지 깨닫는다. 역설적이지만 아름다운 육아의 순간들. 그렇게 나는 육아(兒)아닌, 육아(育我)휴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글은 어떤 솔루션을 주지도 못하고, 육아일기도 아닐테다. 삶의 큰 전환점에 서있는 누군가, 또다른 우선순위가 내 삶을 치고 들어와 흔들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누군가, 그리고 육아와 커리어 사이에서 방황하는 누군가에게 그저 '나도 그래.' 조용한 위로와 용기를 건네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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