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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곤지 Oct 24. 2022

'제자리걸음'도 대단한 일이거든요

남들보다 뒤처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때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듯한 이 시간,
나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아닐까?
어쩌면 '나'라는 사람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육아를 하다 보면 그런 생각에 자주 빠진다. 이제 겨우 3개월 육아휴직으로 일을 놓고 있는데도 불안감이 올라온다. 1년이나 남은 휴직기간. 아이를 생각하면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일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사회적인 '나'라는 모습을 생각하면 다소 막막한 기간이다. 아마 '인생의 전환점'에 있거나, 삶의 또 다른 우선순위로 인해 지금까지 내가 유지해왔던 역할을 내려놓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누군가라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일을 하지 않는 내 모습이 어색해서. 사회적으로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오다가 잠깐 멈춰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마치 사회적인 자아가 내 전부인양 살아왔는데, 오롯이 '나'라는 사람만을 덜컥 직면하기가 어려워서. 때론 불안감이 물 밀듯이 올라온다.


경쟁 사회 속에서 언제나 톱니바퀴를 열심히 굴려서 살아오는 것이 익숙했던 우리에게는 쉼의 시간이란 어색하기 그지없다. 누가 뭐라 그런 것도 아닌데도, 마치 달리기에서 뒤처질 것만 같고. 이제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인 걸까,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두려움이 불쑥 올라오곤 한다.



육아 중간, 잠깐의 짬을 낼 때 '유퀴즈 온 더 블럭'을 자주 찾아본다. 짧은 토크쇼 분량 속에서도 깊이 있고 담백하게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알고리즘에 뜬 한 영상을 찾아보았다. 걸스데이 혜리가 나오는 영상이었는데, 평소 같았다면 보지 않고 넘길법한 주제였지만 오랜만에 가벼운 대화를 듣고 싶어 보게 되었다. 역시. 기대하지 않았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되는 보석 같은 지혜들이 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165화 중
시간이 지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 입장에선 제자리걸음도 힘겨운 때였어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스러운.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까지 있지 못했을 거예요.

(혜리는 유재석은 1위이기 때문에 제자리걸음을 해도 1위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게)


나는 늘 성장하고 발전하는 삶을 살아오고 싶었다. 
매일, 매해가 나아지는 그런 삶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성장'과 '발전', 그리고 '변화'의 정의는 항상 커리어나 경제적인 수준, 사회적인 어떤 역할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만 존재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육아로 인해 힘껏 굴려왔던 톱니바퀴가 잠시 멈추자, 마치 인생에 아무것도 없어진 듯이 깜깜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바삐 살고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제자리걸음을 하고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 뭐'하고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 같아서 괜히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해요


육아 휴직을 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잠시 멈춤의 상태에 있을지 몰라도, 부모라는 새로운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이 한층 인격적으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이 세계에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구나,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직장에 다닐 때는 몰랐던 다양한 직업과 삶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더 만나게 된다. 아이를 키우면서 지금까지 나를 돌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차원의 기쁨과 행복감을 자주 만난다. 엄마라는 자아를 가진 내 모습을 새롭게 발견한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멈춰있는 듯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삶은 더 풍성해졌다. 이쯤이면 훌륭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아닐까.


요가매트에 조용히 서있다 보면 느낄 수 있는 '서있는' 감각. 가만히 서있는 것도 많은 근육이 필요하다.

때로는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지금까지 힘껏 굴려왔던 톱니바퀴를 멈추어야 할 때가 있다. 멈추어야 다른 기회를 찾을 수 있고, 멈추어야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멈추었을 때조차도 부지런히 구르고 있다면. 제자리걸음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그저 제자리에서 걷다보면, 어느새 나는 새로운 성장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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