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도안과 서술도안

뜨개질3

by 오동

뜨개질을 할 때 도안을 보면서 하는데 크게 2가지 종류의 도안이 있다. 기호도안과 서술도안. 기호도안은 주로 일본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뜨기 기법별로 고유한 기호가 있어, 이를 바탕으로 그림과 기호를 사용해서 도안을 표시한다. 서술도안은 영미권에서 주로 사용되며 말그대로 줄글로 뜨개 방법을 상세히 설명해 놓은 도안이다. 예를 들어보면, 서술도안의 경우에는 '20코를 잡습니다. 1단: 모든 코를 겉뜨기 합니다. 2단: 모든 코를 안뜨기 합니다. 원하는 길이가 될 때까지 1단과 2단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작성되어 있고, 기호도안은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이런식으로 기호로 표시하고 각 기호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두가지 도안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나는 기호도안을 선호한다. 처음 배우기를 기호도안으로 시작하기도 했고, 한 눈에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어서 좋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서 미리 앞 일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 안도감을 준다. 그렇다. 나는 확신의 계획형 인간이다.


출처: 바늘이야기


결혼하기 전 집안일 분담에 있어 남편은 '시간되는 사람이 하자' 주의 였고, 나는 '일단 각자 담당을 정해놓고 못 할 상황이 되면 서로 도와주자'고 주장했다. 결국 우리는 항목항목 나눠서 누가 할 지 정했는데, 1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은 누가 어떤 집안일을 하기로 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서 왜 각자의 담당을 지키지 않았냐고 분노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이런 것을 보면 나는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만 세우는 것은 아닌 듯하다. 계획은 계획일 뿐, 얼마든지 틀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세운다.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겠다는 희망을 반영하지만 이렇게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면 스무살 이후로 해외여행을 1년에 최소 한 번씩은 다니는 '여행쟁이'인 나는, 신혼여행에서 처음으로 예약한 숙소에 자의로 체크인 하지 않는 사태를 겪었다.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이동하여 2박을 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는데, 마지막 도시인 밀라노의 숙소를 굉장히 고급진 곳으로 잡아놨었다. 피렌체를 여행하는 도중 남편이 이탈리아 프로축구 리그인 '세리에A'를 보고싶다는 말을 했다. 미리 티켓 예약도 안한 것은 물론, 일정을 짤 때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어서 우리가 여행을 하는 동안 경기가 진행된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그러게 온 김에 보면 좋았을텐데 아쉽네"라고 답하고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다음날 또다시 축구 얘기를 꺼내는 남편을 보고서야 '진심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렌체에서의 경기는 우리가 밀라노로 넘어가야하는 저녁에 있었고, 그 경기를 보고나면 막차가 끊겨 밀라노로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보고싶어하는 남편을 위해 '언제 또 이탈리아에 와서 축구 경기를 볼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티켓을 구하면(물론 그의 사비로) 경기를 보고 하루 늦게 밀라노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경기 하루 전 날 티켓을 구해냈고, 우리는 밀라노 숙소를 하루 날리고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

그 날의 축구경기는 인상깊은 장면 투성이었는데, 가장 놀란 것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경기 시작 전 피렌체 대성당 앞 광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몰린 인파와 입장하기위해 끝없이 선 줄에는 남녀노소 경기를 보러 모여있었다. 그곳에서 관광객이나 관광지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진짜 이탈리아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경기장에 들어가니 내 옆에는 혼자 경기를 보러 와서 조용히 담배를 피며 경기에 집중하는 여성이 있었고, 상대편을 시끄럽게 응원하며 눈칫밥을 먹는 남학생도 있었다. 나는 축구경기를 하는 선수들을 단 한 명도 알지 못했지만, 선수들의 엄청난 플레이와 관객들의 열렬한 응원에 고양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 속에서만 보던 선수들을 직접 보며 신나하던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밀라노 호텔값이 전혀 아깝지 않은 일이었다. 이게 다 계획이 어긋난 덕에 생긴 일이었고, 계획형 인간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애정하는 춘천의 북스테이 '썸원스페이지 숲'이 추구하는 문장은 '계획없이 왔으니 틀어질 일도 없다' 이다. 썸원스페이지 사장님이 숙박객들에게 해주고 싶어하는 말씀이다. 이곳에서는 계획 없이 와서 편히 쉬다 가라는 마음을 담아. 하지만 나는 이 문구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계획있이 왔으나 틀어져도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헬레보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