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들어온 지 두 달이 조금 지났다. 2주 동안 격리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다녀왔다. 금세 적응을 한 탓인지 파리에서 1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꿈을 꾼 기분이다. 혹은 아주 짧은 여행을 다녀온 것 같다. 1년 동안 일을 하고, 여행을 하고, 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툭하면 소주와 한식 타령을 하니 친구들은 ‘이 새끼 프랑스 안 갔다 왔다.’라고 한다. 진짜 꿈인가?
1년간 파리에 살면서 있었던 굵직한 일이 몇 가지 떠오른다. 아마 이것들을 제외하면 남는 게 없는 파리 생활일지도 모른다.
첫 번째는 한인 마트에서 일한 것이다. 프랑스로 떠나기 얼추 3개월 전부터 불어 공부를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3개월으로는 한참 모자라겠다 싶어서 프랑스인들과 섞여 일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많은 경험을 하리라 다짐했다. 어쨌든 생계 유지는 해야 하니 불어가 미흡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한인 마트에서 일하게 됐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10개월 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나 쌓은 연이 끊기지 않길 바란다.
두 번째는 châtelet역 근처에 있는 sunset sunside jazz club에서 마신 맥주다. 이곳은 마트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가 데려갔던 곳인데, 맥주가 유별나게 맛있던 건 아니지만 허구한날 가서 기억이 난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안주 삼아 마시던 맥주는 훌륭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친절한 직원, 좋은 동료까지 좋았다. 아마 1년 동안 그곳에서 맥주를 100L는 마시지 않았을까?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곳에서 파는 티셔츠를 사오려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사오지 못했다. 아직도 억울하다.
세 번째로 마레에 있는 Fringe에서 마신 라떼가 기억난다. 파리에서 사는 동안 많은 카페를 다녔는데, 그 중 가장 좋아하던 카페가 Fringe다. 이곳에서 가장 먹어볼 만한 메뉴는 라떼다. 이곳은 파리의 여느 카페와 다름없이 에스프레소와 우유, 얼음을 함께 쉐이커에 넣어 섞어준다. 라떼는 아주 묵직해서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참고로 나는 산미 강한 아메리카노와 묵직하고 고소한 라떼를 좋아한다. Fringe에 지인 여럿을 데려가기도 했고, 쉬는 날이면 꼭 이곳에 들러 라떼를 한 잔 마셨다.
네 번째는 명구의 카페다. 명구는 나의 학교 선배인데 현재 프랑스 살이 7년차 쯤 됐다. 명구는 파리에 한국식 카페를 열었다. 각종 음료와 빙수, 한국식 디저트를 파는데, 인기가 상당히 좋다. 이벤트를 열어 바쁜 날이면 가서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한인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명구의 카페에 들러 놀다 갔다. 명구는 내가 파리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줬기 때문에 나도 웬만하면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물론 받은 것에 비하면 형편 없긴 하다만. 매일같이 가던 명구의 카페도 그립다.
다음은 일하던 한인 마트의 사람들이다. 위에서 마트 이야기를 했는데 왜 또 하냐고 묻는다면, 마트에서 일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고 마트에서 만난 사람들도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의지할 만한 사람은 명구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마트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겁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툭하면 퇴근하고 같이 술 마시던 용익, 한국어를 끝내주게 잘했던 노노와 폴린, 꿈 찾아 삼만리 떠난 동명이인 재석과 준현, 생글생글한 웃음으로 이야기 잘 들어주던 성수, 클라이밍의 세계를 알려준 진솔, 말은 잘 안 통해도 툭하면 장난치던 토모키와 켄야, 같이 일한 시간은 짧지만 즐거웠던 세희, 4월 내내 같이 위닝했던 야마토, 그 외 병수, 재서, 진솔, 유정, 히토미 등등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스친다.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다음은 밤의 센강이다. 이거야 뭐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이니 굳이 긴 말로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명구, 명구 여자친구와 셋이 센강에 앉아 햄버거에 맥주 마시는 걸 시작으로 센강은 지겹도록 봤다. 지겹도록 봤지만 질리지 않았던 걸 보니 대단한 것이 맞는 것 같다. 가끔 센강을 따라 바스틸 광장에서 루브르까지 걸었는데, 그 길은 지금도 생생하고 그립다.
마지막은 날씨다. 사실 이것도 길게 쓸 필요가 없다. 유럽의 날씨가 끝내준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기 때문이다. 특히 유럽의 여름은 환상적이다. 아쉽게도 나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를 가보지 않았지만 파리의 여름도 훌륭하다. 밤 10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은 유럽은 최고다. 해가 긴 게 뭐 좋냐고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이 없다. 건조한 덕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유럽에서 해가 긴 게 좋은 거지, 습한 한국에서 해가 긴 것은 사실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해가 긴 건 사람이 우울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는 것 같기도 하다. 청량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쁜 생각이 모두 날아간다. 유럽의 날씨가 그립다.
돌이켜보니 그리운 것들 천지다. 그래도 다시 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전에도 썼듯이 나는 한국이 가장 좋다. 편한 곳에서 내 사람들 곁에 두고 살고 싶다. 글도 쓰면서 살아야 하니 더욱 떠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아 외국으로 떠난다. 나는 꿈 찾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1년만 살아보자 라고 생각했던 것이니 돌아왔다고 하기는 애매하고,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특정한 것들이 매일같이 떠오른다. 여행으로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한가득이다. 살면서 느꼈던 순간들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다. 다시 갈 수 있을까. 그런 여유가 나에게 주어질까. 손에 쥘 수 있는 것일까. 꿈같던 1년을 지나 고향에 돌아왔더니 안 다녀온 기분만 든다. 정착하기 위해 했던 고생, 떠나기 위해 했던 고생들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은 기억만 머리에 남아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좋은 것들만 남겨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건 같은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언제가 될지, 아니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다. 다시 한 번 그곳을 자세하게 느껴보고 싶다. 그곳의 음식, 맥주, 커피, 그 외 모든 것들.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