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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파별 Jun 17. 2019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고흐의 삶과 작품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체험전시 - 서울 중구 우정아트센터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전시회는 고흐의 명작을 둘러보며 그의 삶도 함께 알아갈 수 있는 체험형 전시이다. 작품 하단 'PLEASE DO TOUCH'라는 문구가 재밌었다. 시각뿐 아니라 촉각을 통해서도 그의 작품과 붓터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고흐의 일생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출생했고, 어머니로부터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동생 테오와 절친했고 일생동안 테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림과 인생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고 단 하나의 작품만 팔았다고 한다. 평생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조울증, 조현병으로 고통받았다. 예술적 동지였던 고갱과의 잦은 다툼 끝에 그만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고 이후 들어가게 된 정신병원에서 많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 무렵 탄생한 그림들은 사후에 명작으로 인정받게 된다. 고흐는 예측할 수 없는 발작에 늘 불안했고 이에 대한 대처법은 그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았고 3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테오 부인 요안나가 형제간에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엮어 책으로 출판하였고 그 책을 계기로 고흐라는 사람과 그가 그린 그림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 - 고흐] - 살아 생전 유일하게 팔린 그림


고흐의 사랑과 영감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것들, 특히 예술에 대해 배울 수 있어.”
"인생은 수수께끼 같아. 그리고 사랑은 수수께끼 안의 수수께끼지."

빈센트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한 것은 무엇이든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생을 나눌 좋은 인연을 갈망했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흐의 사랑은 부도덕했고 비극적이었다.


키 보스(1881)

그녀는 과부였고 4살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녀는 빈센트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빈센트는 그녀 집 앞에 찾아가 등불을 들고 고백하였다. 결국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엔 후르니크(1882-1883)

그녀에게는 어린 아이가 하나 있었고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시엔은 빈센트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고흐는 가난한 그녀를 측은히 여겼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하지만 빈센트의 가족은 그녀가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둘의 만남을 완강히 반대했다.


마고 베게만(1884)

뉘넨에 거주하던 당시, 이웃이었던 베게만은 12살 연상이었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다. 두 사람의 가족은 모두 이 관계를 반대했고, 이에 베게만은 죽고 싶다며 독약을 마신다.


아고스티나 세가토리(1886-1887)

그녀는 파리에서 카페 겸 선술집을 운영하던 여자였다. 빈센트는 꽃 정물화를 주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점차 세가토리의 카페 벽면에는 고흐가 그려준 그림들로 장식되었다. 그녀는 고흐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여겨 아이를 지운다. 그녀는 카페를 정리하고 고흐와의 관계도 정리하였다.


고흐와 고갱

고흐와 고갱

고흐에게는 예술적 동지, 화가공동체가 필요했다. 아를에서 고갱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었지만 고흐는 완벽주의적이고 고집이 강한 성격이었고 무엇보다 둘은 그림에 대한 견해차가 매우 컸다. 서로의 자화상을 그려주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그 그림은 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였다. 결국 고갱은 고흐를 떠났고 이에 대한 스트레스로 고흐는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버린다. (귀를 자르게 된 건 환각 증상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한다.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키다

고흐가 머물었던 정신병원 - 생 레미 요양원

고흐는 36세의 나이에 급성 조증으로 진단받았고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했다. 정신질환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더욱 더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였다. 병원생활의 유일한 단점은 게을러지는 것이라며 그는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다. 그 무렵 탄생한 그림들 다수가 사후 명작으로 재평가받게 된다.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시점부터 오디오 볼륨을 더 키웠다. 오디오만 6번을 반복해서 들었고 웬지 이 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흐와 나와의 접점을 찾은 듯 했다. 아무래도 정신과에 근무하다보니 관심이 더 갔다. 고흐는 입원생활 중 아침 5시부터 자기전 9시까지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우리는 '부지런한' 모습이라고 느낄테지만 고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서 그림을 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남달랐으니 말이다. 오히려 우울, 불안, 고통 등이 어지럽게 공존하는 내면 상태와 조용하고 단조로운 병원 환경이 예술혼을 발휘하며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되어준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고통을 이겨내고자 그림그리기에 더욱 몰두하였다. 이 곳에서 사후 높은 값어치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많이 탄생한다. 그는 생레미 정신병원 풍경이나, 낮과 밤의 자연을 그리곤 했다. 병원 그림을 보는데 얼핏 내가 근무하는 병원과 비슷해보이기도 했다. 경험했던 환자분 중에 그림을 잘 그리셨던 환자분도 떠올랐다. 나를 포함해 병동 선생님들의 초상화를 그려주셨었다. 그림을 선물받고 훈훈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별이 빛나는 밤에 - 고흐] 병원 생활 중 탄생한 명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흐 그림.
[가셰 박사의 초상 - 고흐] 고흐의 작품 중 가장 최고가로 팔렸다. 1990년에 8250만 달러(918억)에 낙찰되었다.


고흐의 작품 중 최고가에 낙찰된 작품은 고흐의 마지막 정신과 주치의 초상화, [가셰 박사의 초상]이다. 고흐를 마지막으로 돌보았던 의사라는 점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이 의사는 고흐와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고 둘은 절친이었다. 가셰 또한 아내와의 사별로 우울증을 앓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가셰는 어릴적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의사와 환자로 시작된 이 관계는 금세 절친한 관계로 발전한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우울''그림' 이라는 두 공통점이 큰 역할을 했을 것 같다. 처음에 고흐는 의사 가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환자인 자신보다 의사가 더 우울하고 아파보였기 때문이었다. 위 그림에는 가셰 박사의 우울한 감정이 분명하게 보인다. 가셰 박사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고 계속 잘 그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게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폴 가셰 박사는 다른 유명한 화가들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 르누아르, 드가, 세잔, 파시로, 마네 등) 오랜 세월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의 그림을 누군가가 알아봐준다는 것이 고흐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나는 형제같은 진정한 친구를 찾았어. 바로 가셰 박사야. 우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서로 너무 닮았어.'
-고흐가 여동생 빌헬미나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과감하고 개성있는 거친 붓터치, 밝고 강렬한 색감, 두드러지는 노랑색. 고흐 그림들의 특징이다. 그는 후기 인상파 화가로서 사물을 사실 그대로 그리지 않았고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개성있게 그렸다.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 밖에 팔지 못했지만 사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인류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짧은 생애 동안에도 850점이 넘는 유화와 1200점 이상의 소묘를 남겼다.


고흐의 그림이 사후에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언제나 안타깝게 다가온다. 이제는 그가 자살에 사용했던 권총이 경매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 남달랐고, 독특했고,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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