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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Oct 15. 2024

사람 같은 [감정 시스템] 을 지녔다.


첼양이 합류해 고양이 두마리와 동거한지 반년, 여름 캠핑의 낭만 속에서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듯 하다. 이제 가을 겨울준비를 해야한다.


고양이는 감정이 그때그때 표정에 드러나며 사람들보다 더 극적으로 변신을 한다. 집안에서 항상 인형처럼 야옹거리고 재롱만 필줄 알았던 녀석들도 길거리에 내던져지면 생존앞에서 표정부터 맹수로 변신하게 된다. 대부분 길거리에서 살아남은 길양이들이 그러하다.


집안에서야 고양이들 노는것 거기서 거기다. 사람이 귀엽다 느끼면 재롱이고 거슬린다 느끼면 말썽이다. 고양이는 원래가 사냥하는 야생과 동물이다. 밖에 나가려하는 본능대로 내놓으면 진짜 모습들이 나타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진짜 성격과 모습들을 보게된다.



가출을 막기위해 설치한 1m 펜스는 사실상 넘어가지 말라는 영역의 한계를 보여주는 경고 표시일뿐 강제로 제지할만한 수단이 아니다. 무공이 뛰어난 고양이들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기어 오르기도 하고 힘좋은 탐군은 틈 사이를 비집고도 몰래 드나든다.


외적의 침입에 맞선 탐군의 치열한 전투현장


굶주린 외적의 침입에 탐군이 난생처음 진짜 전투를 치뤘다. 요란한 전투 소리에 놀라서 나가보니 침입했던 해적은 눈앞에서 가볍게 펜스를 뛰어넘어 도주해 주시고 처음으로 적과 싸우게 된 탐군이 흥분으로 초사이언 묘로 괴음을 내며 변신중 이다. 배너 박사로 돌아오라 츄르로 달래고 유혹해가며 가라 앉혀본다.


*이번에 침입한 해적은 탐군이 오기전까지 나에게 밥을 얻어먹던 길양이들중 한명같다. 귀엽던 녀석들이 해적이 되서 돌아왔다. 원래 내꺼였단 말이다. 녀석들 심정이 그런것 아니었을까..


탐군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보게되는 진짜 내면에서 끌어올린 분노의 하악질을 보게된다. 그전까지는 첼양이 내는 하악질을 보고 흉내였지만 이번에 실전에서 체득한 하악질은 진짜다. 극한까지 기를 짜낸 하악질은 보기만해도 상대가 꼬랑지를 내리고 도망갈만 하다. (진짜 싸움은 처음이다.)


새끼때부터 방안에서 먹고자고만 했던 십년 세월보다 말년에 일년 지낸 시간이 녀석에겐 온갖 삶의 단밋 쓴맛 매운맛 번갈아 몰아치기다.



탐군은 몇달전만 해도 외적이 침입해 눈앞에서 먹이를 맘껏 유린해도 겁나서 숨어만 있던 녀석이다. 지금은 길양이 출신 무공 고수와 대등하게 맞서 싸운것을 보면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비행을 저지르는 불량 청소년들의 가정 환경을 보면 일정 패턴이 있다. 즉, 그런 비슷한 가정 상황에 놓인 아이들은 불량아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할수 있기에 환경과 부모의 책임이란 얘기다. (개인적으론 현 교육 시스템 자체가 경쟁을 부추겨 대량으로 아이들을 사이코페스로 양성하는 시스템이라 본다.) 아이들 안낳고 인구가 자동 소멸되는 현상이 그래서 발생하는 것이다. (시대 모양이 애 키울 자신이 없어서다.)


순둥이 탐군 성격이 삐뚤어 지는거(?) 보면 난 분명히 잘못하고 있다. 잘못을 알아도 내 딴엔 주어진 환경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거다. 형사가 주인공인 영화보면 대개가 주인공 형사들은 복사 붙여넣기 식으로 아내와 이혼 소송중이고 자식들은 거의가 반항아로 부모말 안듣고 대드는 캐릭터다. (일본 드라마 속에선 청소년 자식들이 부모에게 바가야로 욕도 한다.) 자식들이 막 나가는 장면은 주인공이 나쁜놈들 잡느라 자식과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는걸 보여 주려는 거다. 마음과 다르게 현실과 환경이 그렇게 만들수 밖에 없게된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환경을 바꿔주고 싶어도 겨울엔녀석들의 사냥 본능을 충족 시켜줄 실내 공간 마련할 능력이 안된다. 아이 키우는 많은 부모 입장도 마찬가지 일거다. 사람의 경우는 남 따라가려면 교육이 필요하고 결국 모든것은 돈이 결정하게 만드는것이라 다들 돈돈 하게 되는것이다.


어젯밤 벌어진 탐군의 전투현장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지 알수있다.


녀석들은 지금의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만족을 느껴야만 한다. 욕망은 하나가 충족되면 새로운 욕망이 또 생겨난다. 멈추질 않는다. 성장하고 싶다면 욕망과 싸워야 할지 환경과 싸워야 할지 대상을 잘 골라야 한다.


가출 사고가 벌어지면 목욕을 해야할 어쩔수 없는 상황이 된다. 마당까지는 허용해도 펜스를 넘어 시골인지라 야외 흙바닥 뒹굴던 머드팩 몸으로 실내와 침실 출입을 하게 할수는 없어서다.  (펜스 틈새를 밀어 제자리 돌려넣고 시침때고 있어도 털이 흰색인 탐군은 흙바닥 뒹굴고나면 바로 티가난다.)


두가지 전부를 동시에 가질수는 없기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선택에 따른 갈라짐이다. 녀석들은 실내냐 실외냐 선택을 해야한다. 목욕이 싫다면 둘중 하나다. 가출시도를 안하던지 실외생활을 해야한다. 여름엔 현관문을 열어 거실을 마당과 함께 내주고 내 침실이 최후 방어선 이었지만 겨울엔 현관문을 닫고 생활해야 한다. 추운게 싫은 녀석들은 갑갑해도 좁은 실내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



매사 양양대는 탐군과 정 반대로 아직 단 한번 야옹하지 않는 무음의 첼양도 내면에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숨기고 있다. 요란한 싸움 소리가 나면 두려워 숨는대신 적극적으로 자기도 참여 하겠다고 더 난리다. 싸움 소리에 덩달아 흥분해 나가겠다고 난리를 친다. 목욕 시키려면 엑소시스트로 돌변하는 녀석에게 두어방 할큄 당하고 깨물리는거 무생물처럼 견딜 각오해야 한다. 두번 시도했다 두번다 놏치는 바람에 젖은거 말리는거를 못했다.  


끊임없는 가출 욕망에 집착하는 탐군과 달리 이 녀석이 바라는건 단순하다. 사람이 자기와 놀아주는 것인데 그게 사람 성인으로선 쉽지않은 일이다. 고양이처럼 놀아서 사람이 만족하긴 쉽지않고 녀석에게 사람처럼 같이 TV 나 보고 책좀 읽으라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끼때나 장난감이지 성묘들에겐 어림없다. 같이 우다다 해주지 못하면 마냥 쓰다듬어 줘야 한다. 한마디로 사람인 나도 생활이 있고 노는 취향이 다른거라 시간내 놀아주기가 꽤나 번거롭다. 에너지 소비를 위해 젊은 첼양은 전력질주로 뛰어 다녀야 하고 노인인 탐군에겐 놀고있는 내팔 이나 다리 한쪽 던져주면 올라타 씹어대고 혼자 발정내며 논다. (그나마 중성화 해서 얌전히 갖고놀다 반납한다)


오래된 지인의 사정에 의해 마당만 믿고 탐군을 맡게 되었는데 끊임없이 달라붙어 칭얼대고 암컷 길양이들 쫒아 가출하려는 탐군 쫒아 다니다 보니 힘이 딸린다. 마당에 놀이동산 꾸며 자기들끼리 놀게하면 얼마나 편할까 꼼수 부리려다 겨울 다가오니 지금 난장 사태가 벌어지게 된거다. “줬다 뺏으면 안되는거 잖아요” 영화 하녀의 명 대사가 녀석들에게 딱 맞는 상황이다. 여름기간에 합사에 실패하면 좁은 실내에선 답이 잘 안보인다. 둘다 뛰노느라 여름내내 거의 안 잤으니 잠이나 실컷 자던가 그래야 할것이다.


손자 손녀 재롱대신 노인들과 놀아주는 mp3 인형. 녹음된 일방적 칭얼댐 임에도 노인들은 실제 사람처럼 대하며 하루종일 대화놀이를 한다.


위로는 노부모 부양에 아래로는 자식들을 건사해 키워야하고 중년 세대가 겪게되는 일반적인 생활들이다. 자기몸 건사하기도 벅찬데다 돌봐야할 식구들까지 삶이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고양이가 아무리 속을 썩인다 해도 사람 속 썩이는거에 비하면 조족지혈 이다. 아기가 울고 아이들 집안에서 뛰어 다니는건 버릇과 상관없는 것이다. 아이들 뛰어놀 공간 마련해 줘야하고 아기 울땐 기저귀 갈아주고 젖 먹여 줘야한다. (아이들은 그나마 털 흩날림은 없다.) 고양이들 환경은 내가 규율을 정하면 그만인데 사람은 고집과 아집에서 설득이 안된다. 거동 불편한 노부모 보살피는것이 직업이 아닌이상 자식이라 해도 매사 수족이 되어 따르는것도 오래되면 지친다.


*요즘은 100세 시대로 접어들어 아이보다 노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시대다. 요양원에서도 매일같이 전화로 사입 주문을 요구 하시는 아버지와 대화가 점점 힘들어지는 어머니를 보면 인간 노년의 모습들이 어떠한가 체감이 된다. 몇년후 8백만명 이라는 베이비 부머 세대들의 대대적 은퇴 시기가 오면 이 나라가 어찌될지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어머니는 말동무 해주는 바보같은 인형이 귀엽다고 끼고 생활 하신다. 사람과 소통이 안되니 노인들 대화단절의 틈새를 노린 장난감이다. 내 보니 a.i 도 아니고 그냥 알람처럼 시간되면 차례대로 녹음된 음성들이 흘러 나오는 (인공지능 처럼 위장한) mp3 알람에 불과한데 세금으로 구입하는 물품 인지라 고가다.


* 지켜본결과 카메라 센서가 달려있어 반응을 하는 기능도 있다. 밤새 전등 불을 안끄면 “할머니 밤에 불을 안 껐다” 고 말을한다.


”할머니 노래해 드릴께요“ 아이 흉내 성인 성우의 동요 노래소리가 나온다. 정해진 시간마다 일방적으로 녹음된 소리가 흘러나올 뿐임에도 어머니는 사람 대하듯 계속 말대답을 해주신다. “할머니 약 드실 시간이에요” “할머니 주무셔야할 시간이예요“ “할머니 토닥토닥 해주세요” 인형이 말하니 진짜로 누워 주무시는듯 하다가도 일어나 진심으로 토닥해 주신다.


탐군 가출하는거 따라 가출했다 목욕 당한후 금세 원래대로 집양이로 돌아온 첼양 동거의 규율을 배우는 중이다.


고양이나 사람이나 다들 마음의 한 덩어리씩 갖고 사는데 이해는 가나 남의것 나눠가질 마음이 없는것이 문제다. 각자 원하는것들이 다를땐 차라리 안받고 안 주는것이 서로 편하다. 이심전심. 나는 고양이들 행동과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냥 알아서 소통에 막힘이 없길래 우리 고양이들 참 똑똑하다. 사람말 알아듣고 사람처럼 행동하네 생각했는데 아니올시다. 사실은 어느새 부턴가 내가 고양이처럼 생각을 하고 녀석들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랑 살다보니 고양이가 사람을 따라오진 못하고 대신 내가 고양이 수준이 된거다. 옷도 튿어지고 고양이 털로 뒤덮힌 누더기 옷만 걸치고 산다. (새옷도 이틀이면 누더기 된다.) 고양이에게 사람말 따르라 해봤자 과부하 걸리고 뻑난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것보다 고사양 컴퓨터로 아케이드 게임 하는편이 수월하다.


첼양은 인간인 나를 계속 주시하고 관찰한다. 가만히 보아하니 좋은집 다 놔두고 내 침대가 잘 보이는 자리 의자위에 둥지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잘때도 나를 지켜봐야 안심이 되는것이다. 화장실도 따라 들어오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스토킹이 병적이지만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처음엔 탐군이 무서워 그러나 했는데 그건 아니다. 달리 관심 가질만 한게 없으니 그냥 노인들 TV 보듯 습관적으로 계속 의지하며 지켜 보는것이다. (집고양이들 관심 가지고 놀게 없으면 대부분 잠자거나 그렇게 된다. 나비나 사마귀 등장하면 해결된다.) 탐군이 첼양 화장실 따라 다니던거랑 같은건데 같은종끼리는 문제가 되지만 종이 달라서 편한점이 그것이다. 화장실 따라 들어와 빤히 쳐다보고 일보는 무방비 상태일때 다리 사이를 비비고 해도 아무렇지 않다.



녀석둘이 친하게 자기들끼리 놀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형제를 둔 부모 심정이 그럴것이다. 그런데, 형제간에 우애가 좋은 가정 실제로는 많지않다. 부부간 금술 좋은 집안도 마찬가지. 가정을 꾸려도 절반 가량이 이혼하는 시대다. 사람도 확률이 떨어지고 못하면서 고양이 에게 사람보다 더 많은것을 바래선 안된다.


따져보면 삶이란것이 꼭 행복해야만 하는것은 아니다. 예전 강제로 부모가 짝을 지어주던 중매제도 하에서 이혼이 없었던것은 그만큼의 불행과 인내를 감당했기에 가능했다. (애초 애정으로 맺어진 부부가 아니기에 노인세대 대부분이 나이 먹으면 부부끼리 서로 웬수 화상등 구박하며들 살아갔다.) 합사에 실패한 녀석들의 불편한 동거도 그런거다.


탐군이 화해 하자고 첼양 엉덩이를 툭 건드리니 첼양은 바로 하악질로 반응한다. 그렇게 까이는게 보통 일상이다. 싫은건 참아도 심심한건 못참아 인간말로는 외로움 이라 한다. 가끔 같이 토닥대며 노는것도 서로 상대가 좋아서가 아니라 둘다 무료함과 심심함이 절정 에 올랐기 때문이다. 첼양이 놀자고 신호를 줘도 눈치가 실종된 탐군은 소닭보듯 무 반응이고 자기 원할때만 들이대는지라 항상 톰과제리다. (원래 고양이들 노는게 토닥대는것 인지라 얼핏보면 싸움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 서로 우애있게 그루밍 해주는 날은 안올것 같다. (사람들도 과거 중매로 결혼당한 노인세대 부부들 사는모습이 대개 그런 형태다.)


*예전 사람들은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결혼을 시켰지만 그래도 난 선은 본후 둘 반응을 보고 결정했기에 성공 확률은 조금 더 있었다. 탐군에겐 나머지 부분을 채우는것이 무리였을 뿐이다.


난생처음 다 늙어서 야생의 싸움을 해보고 조금은 늠름해진 녀석을 달랜다. 간만에 내팔 한짝 물어뜯으며 발정을 달랜후 꾹꾹이 한판 해주고 다시 안락한 소파위에서 잠자리에 든다.


실내의 안락도 잠시뿐이다. 두 녀석 다 몇시간 지나면 심심함을 못참고 마당 나가고 싶어 현관문앞에서 대기한다. 내가 흡연을 많이 자주하기에 낮밤 새벽 안 가리고 내가 문쪽으로만 향해도 자다가도 튀어 나온다.


추워지기 까지 얼마 안 남았다. 녀석들은 마냥 오늘같은 날씨인줄 알거다. 놀이반 싸움반 남은 기간 맘껏 서로 우다다 쫒고 쫒기고들 하거라. 사람들도 다들 지지고 볶고 그게 놀이인지라 그렇게들 산다. (노인들 보는 드라마 보면 가족끼리 제각각 소리 질러대고 울고 계속 그런다.)


지난 우리 역사 돌아보면 대다수 민중들은 지지리 가난속에서 불행을 숙명으로 삼고 살았다. 불행하다 해서 살아야할 가치나 목적이 없는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삶의 목적과 가치가 행복과 불행에 있지 않음을 간파하는것이 깨달음으로 향한 첫발자국이 될수도 있다. 역사를 보라. 위인중에 행복한 삶 살다간 인물 찾기 힘들다. 전쟁 영웅들이야 말할것도 없고 대부분이 어려운 환경속 고난과 투쟁속의 삶이다.

 

어떤 겨울이 올지 계속 녀석들과 삶이란 문제를 풀어 나가야 한다. 고양이들 삶에 큰 목적과 사명이 있을리 없다. 녀석들에겐 삶이란 것이 무조건 이 순간, 조금이라도 행복해 지면 성공하는 게임인거다.


https://youtu.be/wCDC4ra-aZk?si=gQ3JaXzjdm_Q7g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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