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와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오뉴 Jun 12. 2019

알맞은 자리에 존재하는 것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생각해보면  엄마는 어린아이에게 가지고 놀던 물건을 제 자리에 두도록 가르친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사용한 물건은 제 자리에 두도록 가르친다.

집 혹은 회사에서 내가 늘 정해둔 자리에 물건이 없으면 순간적으로 당황하다가 이내 발견하고 정해둔 제 자리에 두면 다시 마음이 안정되곤 한다.


엊그제는 집 청소를 하다가 주방 서랍에 항상 두던 작은 토치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토치는 주방 청소 후 마지막에 캔들을 켜고 주방이란 공간을 새로운 냄새로 전환시켜주기에 내겐 중요한 존재인데 말이다.

허둥지둥 다른 서랍도 찾아보고, 거실 수납장부터 안방 다른 곳까지 뒤져봤지만 증발해버린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 작은 토치 하나 없다고 이리 마음이 불편하다니.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생각해보니 남편이 쓰고 어디엔가(늘 어디엔가 둔다) 있을 것 같아 남편의 동선으로 살펴보니 화장실에 있었다! (우리 남편은 화장실 청소 후에 화장실에 캔들을 피우곤 한다.)


혼자 짧은 허둥지둥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작년 가을에 참 좋아했던 시가 떠올랐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찻잔이 차를 담고 있는 일
의자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일
바닥이 신발 바닥을,
혹은 발가락들을 받아들이는 일
발바닥이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일

나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에 대해 생각한다
옷들이 공손하게 옷장 안에서 기다리는 일
비누가 접시 위에서 조용히 말라 가는 일
수건이 등의 피부에서 물기를 빨아들이는 일
계단의 사랑스러운 반복
그리고 창문보다 너그러운 것이 어디 있는가

- 팻 슈나이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류시화 옮김)


그렇다, 생각해보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평범한 사물들이 제 자리에 있어 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과 안정감이 얼마나 큰 가.


사물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고 자연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잘 알고, 그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지 잊곤 한다.


“그 자리에 존재함” 이 주는 따듯한 안정감을 생각해보면 내가 과거에 있었던 자리, 오늘 내가 있는 이 자리, 내일 그리고 앞으로 있을 미래의 자리들 모두 누군가에게 안정감과 사랑을 주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작게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족, 반려 동물, 매일 보는 회사 동료, 혹은 하루에 마주친 그 누군가까지 모두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