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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범수 Nov 23. 2015

#.4 벌써 비를 맞다니, 수비리 가는 길(1)


론세스 바예스~수비리(21km)     

  찌뿌둥한 아침이다. 좋은 줄만 알았던 숙소가 나를 배신했다. 자는 내내 머리위에 있던 창문을 타고 바람이 솔솔 들어와 곤히 잠이 들어야 할 나를 추위로 괴롭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플 새도 추워할 새도 없다. 출발해야 한다. 눈을 뜬 나는 얼른 씻고와서 아침 먹기를 기다렸다. 전날 알베르게 관리인이 아침식사가 7시에 나온다하기에 우리는 느지막이 준비를 하고 시간 맞춰 내려갔다. 하지만 7시 식사는 어디에도 없었고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식사를 준비해서 먹거나 아침을 먹지 않고 출발했다. 


이런.. 이럴줄 알았다면 천천히 준비하지 않아도 될 뻔 했다. 우리가 허탈해하고 있던 차, 함께 허탈해 하고 있던 해창이 형을 만나 어쩔 수 없이 4유로씩이나 주고 자판기에서 즉석 빠에야와 즉석 스파게티를 뽑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었다. 그래도 나름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빠에야도 괜찮았을 뿐더러 파스타도 중간 중간 들어간 참치 덕에 먹을 만 했다. 


  밖에는 예상 밖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례 2일차부터 판초 우의를 꺼내 입을 줄이야 우리는 모두 판초우의를 갖춰 입고 밖으로 나와 출발했다. 론세스 바예스를 빠져나오는 길엔 비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는 자전거 순례자들이 북적이고 있었고, 마을을 조금 벗어나자 우리가 늦게 출발한 탓일지 길은 한산한 편이었다. 비오는 날 숲길을 조용히 가로질러 가는 으스스한 기분은 조금 낯설었지만 상쾌한 아침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성격 급한 아버지는 다른 이들보다 뒤쳐졌단 생각 때문인지 비내리는 숲길을 쾌속으로 걸어나갔다.

빛보다 빠르다 우리 아빠


 지나던 길에 있던 카페엔 미처 아침을 챙기지 못한 순례자들이 늦은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숲길을 벗어나 한참을 마을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이 갑자기 클락션을 울려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니 이 평화로운 아침에 무슨 일인가 고개를 들었다. 자동차에 타고 있던 할아버지는 우리 뒤쪽으로 손을 가리키며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 길을 잘못들었구나. 비가 와 땅을 보고 걷고 있던 차에 앞에 가는 순례자만 따라가고 있어 깜빡하고 길을 놓쳐버린 걷이다. 할아버지는 순례자들이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차로 천천히 앞서 나가며 깜빡이로 길을 일러주었다. 뒤따라가는 순례자들은 그라시아스! 소리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우리는 길을 다시 잘 들 수 있었고 아빠가 신발끈을 묶고 있는 사이 나와 해창이 형은 아빠의 페이스를 생각하여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때 나는 다시 라파엘을 만날 수 있었다! 반가운 라파엘! 나와 해창이 형이 걷고 있는 와중 붉은 색 판초우의를 입은 라파엘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인사했다. 


“범쑤~ 오늘은 좀 어때?” 

“라파엘! 난 언제나 피곤해 언제나!!”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피레네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 때 대화를 나누며 나는 라파엘이 결혼한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의 남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라파엘은 시큰둥히 잘 모르겠다며 대답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다 나는 그녀에게 남편은 지금 어디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라파엘은 "흠.. 그건 따로 살고 있어서 모르겠어.."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쯤에서는 내가 눈치를 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뭐에 씌였는지 괜히 눈치없는 질문을 해버렸다. "왜 따로 살고 있는데?" 라파엘은 진짜 몰라서 묻는거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도 몰라! 그에게 한번 물어봐~"라 대답했다. 나는 그제서야 나의 질문이 실례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바로 미안하다며 사과했고 라파엘은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웃어넘겼다.) 라파엘은 결혼은 했지만 지금은 결국 이혼한 상태였던 것이다. 어떤 상대와 대화를 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좀 알게되어야 하는데 뭔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추적추적 비오는 순례자 길위로 짙은 안개가 가득 끼어 있듯 마음 안에 자기만의 안개를 가득 품고온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 속 안개가 이 길을 통해 걷어 질 수 있겠지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어미말과 아기말


  좀 더 걸어가니 양쪽 초원에 말들이 풀어져있었다. 그곳엔 엄마말과 아기말이 함께 있는 풍경이 너무 평화로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말들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게 아닌가? 말들이 내가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도록 내어주니 내가 이 공간에 일부가 된 듯 행복해진 순간이었다. 내가 말들에게 빠져있는 순간 라파엘은 귀여운 듯 쳐다보며 말들과 좀더 시간을 보내다 오라며 먼저 길을 떠났다. 나는 이것들을 아빠와도 함께 나누고 싶어 뒤에 따라오고 있을 아빠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는 저 뒤에서 다른 말들과 이미 교감을 하고 사진을 찍고 오고 있었다. (누가 우리 아빠 아니랄까봐) 아빠도 빨리 나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허둥지둥 오시는 차라고 하셨다. 우리는 평화로운 말들과의 만남을 뒤로 하고 길을 걸었다. 가는 길엔 긴 숲길이 펼쳐지기도 하고 검은머리 양들이 가득한 초원을 지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미끄러운 진흙 길을 걷던 차에 애리조나에서 온 바비와 디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애리조나에서도 극도로 덥다는 피닉스 지역에서 왔다고 했다. 피닉스.. 그 이름 만큼이나 무더워 보였다. 처음에는 바비와 디나가 체구가 비슷해 같은 연배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걸어가며 옆에서 디나의 모습을 보니 체구만 같을 뿐 얼굴은 할머니임을 알 수 가 있었다. 나는 놀라며 그들에게 친구인줄 알았다고 이야기 했고, 디나는 고맙지만 거짓말은 사양하겠다며 손사레 쳤다. 나는 둘의 관계를 물었고, 바비는 친할머니와 손녀의 관계라고 대답해주었다. 이곳 산티아고에는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이 길을 걷는다. 친구와 걷는 사람, 연인과 걷는 사람, 아니면 내가 아버지와 걷듯 직계 가족과 걷는 사람 또한 혼자 걷는 사람까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할머니와 손녀 딸이 걷는 경우는 잘보지 못했었다.(아직 순례 초반이긴 하여도) 그래서 나는 둘에게 어떻게 둘이 함께 걷게 되었는지 물었다. 바비는 밝게 웃으며 이야기가 좀 긴데 들을 수 있겠냐 물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다. 


"사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었어.. 그때 나는 아빠를 따라 살게 되었는데 뭔가 충격을 받았는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지.. 근데 항상 아빠는 바빴고, 힘들어 하던 나를 보살펴 주신건 우리 할머니 였어. 그때 할머니는 힘들어 하며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나를 항상 신경 써줬고 내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항상 웃어주시더라구..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우울증을 극복했고.. 뭐.. 지금에 내가 있게 되었지!"


그녀는 민망한 듯 웃었고, 디나는 옆에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 그런데 얼마 전 디나가 그러더라구, 나이가 드니까 많은 것이 무기력해 지는 것 같다구, 그래서 나는 이번엔 내가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어! 그래서 은퇴 후 사람들이 재출발을 하기 전 이곳에 많이 온다는 기사를 보고 할머니한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


  이보다 아름다운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손녀의 마음 속 안개를 따뜻함으로 걷어준 할머니 시간지나 할머니 마음 속 안개를 걷어주려는 손녀의 마음, 비오는 순례자의 길에서 순례자의 발걸음이 비를 가르듯 그들의 아픔도 서로의 세심한 발걸음으로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걷다 우리는 어느 숲길에 들어 서게 되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또 새로운 풍경을 맞게 됨에 감사 했다. 이때까지 아름다운 목초지를 가로질러 왔다면 이곳은 머리 위로 끝도 없이 펼쳐진 숲길 이었다. 게다가 보슬비에 젖은 나무들은 잔잔한 숲의 향을 은은히 내뿜고 있었다. 나와 해창이 형은 갑자기 신이 나서, 높은 나무에 비에 젖지 않은 돌길을 즐거이 밟으며 숲길을 걸어나갔다. 그렇게 신나하는 우릴 보며 바비와 디나는 사진을 찍어주었고 우리가 지체하는 사이 그들은 먼저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나는 것도 잠시 부실하게 먹은 아침 탓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길의 중간에 바를 발견 할 수 있었고, 잠시 뒤에 오던 아빠를 기다려 바에 함께 들어갔다. 


  순례자의 길 중간중간에는 간단한 식사나 맥주 혹은 커피를 한 잔 할 수 있는 바가 있다. 그래서 구지 아침을 숙소에서 챙겨먹고 나오지 않아도 바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때울 수 있다. 아침 식사이외에도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점심 시간에 바에 들러 마시는 맥주 맛도 일품이다.



조금 기다리니 아버지도 도착하셔 아버지에게도 뭔가 먹을 것을 사드렸다. 아버지는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가 너무 짜다 하셔서 감자가 들어간 오믈렛을 시켜 드렸더니 맛있게 드셨다. 아빠가 정말 맛있다며 나에게도 한입 권하시기에 먹어보니 정말 맛이 일품이었다. 폭신폭신한 계란에 안에는 부드러운 감자가 들어있어 허기진 순례자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끼니로는 아주 제격이었다.(알고보니 스페인에서 정말 많이 먹는 또르띠야라는 오믈렛이었다. 나중엔 질려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와 해창이 형은 맥주를 한 잔 씩 시켜 깔끔하게 비우곤 출발하려 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먼저 출발해 5분쯤 가고 있는데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안찍은 것을 깨닫고는 해창이 형과 아주머니의 여권을 받아서 다시 카페로 돌아갔다.

  순례자 여권에는 도장을 찍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도장을 찍어가면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800km 거리 증명서와 순례자 증명서를 받을 수 있는 데 사실 도장은 묵은 알베르게 혹은 지나다 보이는 바에서 모두 받을 수 있다. 모든 도장을 받아야 증명서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도장을 많이 받으면 추억이 되기에 되도록 많은 도장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카페로 돌아간 나는 온 김에 화장실에 들렀고 화장실에 길게 늘어진 줄 때문에 시간이 좀 지체 되었다. 그렇게 조금 천천히 나와 아버지 다시 둘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함께 길을 걷는 중에 아버지가 화장실을 다녀오신다하여 다시 한번 뒤쳐지셨는데 비가 그쳐 판초우의를 집어넣고 오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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