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 Oct 21. 2020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싫어, 아무거나 해보기(下)


선선하고 상쾌한 공기를 가득 머금는 느낌이 좋아서 한 달간 주말 루틴으로 야외활동을 했다. 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아라뱃길을 달리거나, 도시락을 싸서 임진각 평화누리에 가곤 했다. 날이 추워졌다. 가뜩이나 비염으로 콧물이 줄줄 나는데 추위에 나가고 싶지 않다. 날씨 탓인가 무기력이 더 심해지기도 했다.


일요일 아침, 일단 먹고 보자. 다행히도 브런치에는 취향을 가득 담을 수 있었다. 통밀 식빵을 오븐에 굽는 사이 아보카도, 토마토, 바나나를 썰어둔다. 바삭하게 구운 식빵에 마요네즈,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바르고 아보카도를 얹는다. 샐러드 채소, 토마토를 골고루 놓고 리코타 치즈를 나이프로 조금씩 떼어내 얹는다.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섞어 뿌린다. 바나나를 가지런히 놓는다.


요리할 때는 Don't touch me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손놀림에 혼자 감탄했다. 아무런 긴장과 불안 없이 할 수 있는 음식이 하나 더 늘었다. 요리는 나의 강박이 드러나는 활동 중에 하나이다. 이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요리할 때마다 남편과 싸우게 돼서 얘기하다가 내가 요리할 때 엄청 긴장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료를 능숙하게 다루고 조리과정에 주저함이 없고 완성된 음식은 맛있고 예뻐야 했다.

스타우브 라이스 꼬꼬떼를 사서 처음 솥밥한 날의 긴장감이 떠오르는구나

다뤄야 할 재료가 많거나 한 번에 2가지 이상 음식을 하게 되면 긴장한다. 특히, 처음 하는 요리라서 레시피를 보면서 음식을 하는 날에는 더 긴장한다. 남편이 완성되지 않은 음식의 간을 보려고 하면 더더. 계속 말을 시키거나 나의 동선과 부딪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쌓였던 긴장이 폭발해서 화를 내게 되었다. 완성된 요리가 맘에 들지 않거나 남편이 맛있게 먹지 않으면 우울했다.


어느 활동을 할 때 긴장을 많이 하는지 알면 조절할 수 있다. 요리에 강박이 있음을 인지한 후, 주로 익숙한 음식을 만든다. 퇴근 후 저녁식사로 처음 하는 음식을 시도하지 않는다. 새로운 음식을 할 때는 시간도 여유 있게 잡고 긴장할 것을 예상한다. 남편에게도 미리 알린다. 내가 긴장할 수 있으니 말을 걸지 말고 옆에 있지도 말고 상 차리는 것만 좀 해달라고. 이런 약속으로 음식 할 때 감정이 조절됨을 느끼면 큰 불길 하나를 잡은 듯한 안도감이 든다.


레몬 케이크와 콜드 브루의 환상 케미

토요일 하루 종일 바느질을 했더니 어느새 작품이 거의 완성되어갔다. 두어 시간만 하면 완성될 것 같아서 바늘을 들 수가 없다. 비상약 한 알 남겨둬야지. 일요일은 요리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집에 감자와 당근이 많아서 카레를 만들기로 했다. 시간이 많으니 돌려 깎기를 한다. 신기하게도 깍둑 썰기한 건 맛이 없고 돌려깎기한 건 맛있다. 자투리는 다져놓고 볶음밥 만들 때 이용한다. 카레도 자주 만들어서 긴장도가 높지 않다. 금방 만들었다.


레몬을 반 잘라 엎어놓은 듯한 케이크. 빵은 새콤 겉에 아이싱은 달콤


잠깐 쉬면서 레몬 케이크와 콜드 브루를 먹었다. 새콤달콤한 레몬 케이크와 산미가 살짝 오르는 콜드 브루를 함께 먹으니 진짜 세상 행복하게 맛있었다. 혼자 먹는 게 미안할 정도로 맛있어서 문 닫고 공부하는 남편 방에 들어가서 입에다가 레몬 케이크를 넣고 우물우물하게 한 뒤 콜드 브루를 넣었다. 남편이 방문을 박차고 나와서 남은 레몬 케이크를 서너 번 퍼먹고 콜드 브루를 꿀떡꿀떡 삼켰다. 먹는 거에 예민해서 화낼 뻔했지만 내 결정에 극도로 좋아하는 남편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면서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음식 조합을 잘 찾아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
당신이 조합하는 음식들을
같이 먹으면 다 맛있어.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밥상을 차릴 때 메뉴 구성에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달고 짭짤한 불고기가 있다면 사이드 메뉴로는 새콤하고 시원한 도토리묵무침이 좋겠다. 쌈채소와 쌈장도 내야지. 기름 맛을 내는 계란말이나 전, 튀김류도 한 가지 놓고 김치도 빼놓을 수 없지 아삭하고 매콤한 배추김치나 파김치도 너무 맛있겠네. 밑반찬으로 간장 베이스에 꽈리고추 향이 좋은 메추리알 조림도 하나 놓고, 불고기가 메인이니 국물로는 간이 강한 찌개보다는 말간 미역국이나 소고기 뭇국이 좋겠어. 막막 파김치도 올려서 먹고 말야.


이렇게 차려놓고 입에 넣는 음식의 순서를 달리 해가면서 먹으면 행복하다. 수저가 여러 군데 왔다 갔다 하며 그릇에 닿으면서 칭칭~ 소리가 나야 밥을 맛있게 먹는 것 같다. 여기에 음식과 잘 어울리는 술이나 음료를 곁들여서 먹으면 매 끼니마다 파티하는 느낌이 난다. 세상에나 글을 적으면서도 맛있네.


제 취미는요 -

남편의 얘기를 듣고 깨달았다. 이게 내 취미구나! 메뉴 조합을 생각해서 맛있게 먹는 일. 소오름. 그렇다면 나는 이미 매일 그것을 하고 있었다. 점심 도시락을 싸면서도 그러했고 매번 디저트를 먹을 때마다 그러했으니. 심지어 내 최애 프로그램은 '맛있는녀석들'이다. 혼자 밥 먹을 때는 항상 넷플릭스로 맛녀석을 틀어놓고 엄청 공감하면서 보고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어색함을 때우기 위해 취미를 물어볼 때 "제 취미는 음식의 맛과 식감을 생각하고 이것저것 다양하게 조합해서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짜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있구나 알게 되어서 기쁘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이미 좋아해서 매일 하고 있었는데 그걸 취미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 참 신기하다. 스스로 무기력한 사람이며 내가 벌떡 일어날 때는 비염 때문에 코를 풀려고 일어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취미는 프랑스 자수, 자전거 타기, 요가하기 등 뭔가 별다른 활동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남편에게 감사하다.


다음 주말에는 매 끼니 식사와 디저트 식단을 만들고 하루 종일 해 먹어야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싫어, 아무거나 해보기(下)

작가의 이전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싫어, 아무거나 해보기(上)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