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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침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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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매영 Jun 22. 2024

해는 뜬다.

 새벽에 깼다. 눈을 뜨니 어둡다. 다시 눈을 감는다. 더욱 어두워진다. 익숙한 것이 갑자기 낯설어질 때가 있다. 어둠을 어둠이라 부르니 어둠이 낯설다. 눈을 질끈 감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온갖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들릴 일 없는 고양이의 발자국 소리라던가 아무렇게나 버려진 검은 봉지가 바람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 같은 것들이 물수제비처럼 나를 지나친다. 나는 하나의 파문으로 남는다. 멀어지는 소리의 뒷모습이 불안하다.


 소리가 사라질 즈음 나는 잠잠해진다. 이제는 내 안의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뛰는 소리부터 밤새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음식을 소화시키는 소리까지 물방울처럼 모인다. 정수리에서 발끝으로 떨어진다. 파문이 옅게 인다.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던가.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내가 나를 두드린다. 외로워진다.


 눈을 뜬다. 옅은 어둠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것을 실루엣으로 마주할 수 있다. 괜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무도 대답이 없다. 가능성은 부재와 만나면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켜 주는 것 같다. 방에 굴러다니는 페트병을 집어 든다. 물을 마신다. 미지근하다. 미지근한 표정들이 생각난다. 우울의 늪에 빠지려 든다. 정신을 차리자. 정신을 차려서 자야 한다.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꿈을 꾸기 위해 기억을 더듬거리며 걷는 상상을 한다.


 고등학교 시절 보건실에서 통곡한 적이 있다. 자퇴를 시켜 달라고. 괴로워 미쳐버릴 것 같다고. 교실에 무표정한 아이들을 견딜 수 없었다. 왕따였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은 내게 비아냥도 욕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비아냥거림과 욕설을 이제는 말이 아니라 얼굴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무표정을 한 꺼풀 벗겨내면 악의가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서 핏줄처럼 악의가 올라오는 것을 볼 때마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들보다 덩치고 힘도 있었지만 싸울 힘은 없었다. 울었다. 처음 키운 강아지가 죽었을 때보다 더 크게 울었다. 울음은 기억을 낳는다. 울수록 창문들도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졌다. 울었다. 내 울음에  보건 교사는 당황해했다. 오열하는 내게 전문 상담사를 매치해 줬다. 위로가 되지 않았다. 보건 교사는 피곤했다. 나도 그가 피곤했다. 우리는 피곤한 시간으로 상담시간을 소모했다.


 다시 시를 썼다. 외로움을 탈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일장에 나가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 자퇴를 시켜 달라고 울었지만 사실 자퇴를 할 용기가 없었다. 학교 밖으로 합법적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시 밖에 없었다. 시를 썼다.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다음 백일장도 반대 없이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뻤다.


 눈을 뜬다. 잠이 오지 않는다. 시를 쓰지 못한 지 오래다. 이제는 나를 위협하는 것은 나뿐이다. 악의에 찬 무표정을 만나면 피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나를 피할 수 없다. 전등을 켠다. 어둠은 온데간데없다. 조금은 기가 찼다. 간단한 일이었다. 선명한 세계다. 지저분한 방이다. 고요하다.


 고양이가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두렵던 소리들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다짐이었고 실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시는 내게 도피의 수단도 관심을 갈구하는 수단도 되기 어렵다. 아침 일기를 쓰며 느낀다. 그냥 써야지.

 

 '일단 해보고 말해라' 자기 계발서 같은 소리다. 조금 인상을 썼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가장 당연하다 생각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화장실에 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본다. 무표정을 지어본다. 나를 향한 악의가 핏줄처럼 드러나는 것이 보인다. 모든 일이 착각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웃는다. 거울 속 나도 웃는다. 아무렴 어때. 살아야겠다. 왼손에는 고독을 오른손에는 의지를 쥔다. 하나만으로 살기는 어렵지. 창 밖을 보 해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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