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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Jun 09. 2023

쇼팽의 즉흥환상곡

& A Love Idea

이십 대 초반이었다.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인 줄 알면서도 다가가길 멈출 수 없었던 첫사랑, 한참 어른이었던 그 사람과의 이별이 예상됐던 공간. 80년대 초반 명동의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고전음악실, '에로이카', 그 사람과 헤어지기 위해 들어섰던 익숙한 공간, 그날따라 에로이카의 오렌지빛 실내가 그렇게 아프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에로이카 문을 밀고 들어서자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쇼팽은 내 생애 최고의 슬픈 음악으로 등극했다. 이별을 고하기 전 쇼팽이 나를 이미 울려버렸다. 


바다마을에 살던 그가 여전히 바다가 보이는 밴쿠버로 떠났고 20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홀로 밴쿠버 여행 중 디스틸러리 역사지구를 걸으며 혹시나 그와 마주치지 않을까 가슴 두근거렸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새로운 역사는 쓰이지 못한 채 그리움 가득한 마음을 안고 몬트리올로 향했다.


쇼팽의 즉흥환상곡, 임동혁 연주


여자는 모름지기 스물넷을 넘기기 전에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야 된다는 부모의 지론에 강력한 거부감을 품은 채 살아왔지만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세뇌된 걸까? 24살, 나는 5월의 신부가 되었고 이듬해 허니문 베이비가 태어났고 또래 친구들이 사는 것처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냈다. 


7살, 5살 남매를 데리고 1991년 늦가을 덕수궁 산책을 나섰다. 시청역에서 전철을 내려 출구로 나가려는데 레코드점에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음악이 흘렀다. 뭐지? 이 음악은? 아이들을 데리고 레코드점으로 들어섰다. 주인분께 지금 흐르는 곡명을 여쭈어보았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OST,  A Love Idea란 곡이었다. 그 당시 그 음악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LP를 구입하고 다시 한번 듣길 원했더니 기꺼이 한 번 더 들려주셨다. 


늦가을 덕수궁 돌담길엔 은행잎이 뒹굴고 있었고 바람은 적당히 싸늘했고, 음악은 내 마음에 수분을 잔뜩 채워 넣었지만 어린아이들은 돌담길을 마구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았다. 나, 잘 살고 있구나. 힘든 십 대 후반과 아픈 이십 대 초반을 잘 이겨냈구나. 지금 내 앞에서 사랑스럽게 뛰노는 아이들이 내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해 가을엔 구입해 온 LP로 무한 반복 A Love Idea를 듣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영화도 구해서 관람했다. 영화가 너무나 아프고 슬퍼서. 27세 Tralala의 삶이 너무 애처로워서. 관람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트랄라가 걸었던 20세기의 브루클린은 21세기에 뉴욕을 세 차례나 찾았지만 트랄라의 슬픈 운명을 느끼기엔 역부족인 브루클린으로 화려하게 변모해 있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OST,  A Love Idea


영상 & 사진출처: 유튜브 &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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