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들래 Mar 30. 2023

사라짐은 마음에 맺힘으로...

작년 11월 목포 여행 중 김현 문학관에 들렀을 때... 그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어려울 거란 생각에 쉽게 마주하지 못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블루빛으로 조성해 놓았던 문학관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존재가 문학관 가득 채워져 있는 듯 여겨졌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지적인 언어 세계에 잠시나마 빠져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서 가장 쉽고 가볍게 접할 수 있는 책 한 권 선정해서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했고, 그의 다작 중 <사라짐, 맺힘>이란 책을 골랐다. 12월 엄마의 책상에서도 이 책을 읽고 토론하기로 했다.


작가는 1990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후 강산이 세 차례나 변했으나 변하지 않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맺힌 상태의 글로 남아 있어서 그 시절을 회상해 보게 했다.

너무 이른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끈끈한 애정이 느껴지던 많은 문인들이 글들을 읽으며 김현의 문학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김현, 그는 죽어서도 우리와 함께 살이 있다." 김형경

"그는 시·공간 안팎을 경계 없이 넘나들고자 했던 구도자 혹은 현자였다." 임동확

"귀를 기울일 줄 알았던, 경청 속에서 신전을 세울 줄 알았던 영혼." 정현종

"김현이라는 뜨거운 상징은 문학의 이름으로, 부재하는 것의 아름다움으로 살아 움직인다." 이광호

"박력의 삶, 정곡의 글, 한지에 써 보내준 정겨운 편지들..." 마종기

"그는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독서 범위가 넓었고, 소탈하며 말을 쉽게 트고 분위기를 맞추는 친구였다." 정문길

"선생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폭력과 억압에 맞서 싸우셨고, 그 싸움에서 조금도 지치거나 물러서지 않으셨다." 권오룡

"김현, 따뜻한 인품과 치열한 문학정신을 동시에 가졌던 분." 허형만


김현의 문장, 문장, 문장들!

"잘못 읽는다는 것은 다른 원칙에 의해서 그것을 읽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것을 구축케 하는 독법이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질수록 자기에게로 가까이 간다! 그 모순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비밀을 쥐고 있다."

"나는 어떤 사상가의 어떤 한 생각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그가 그런 생각에 왜, 어떻게 다다르게 되었을까라는 그 생각까지의 과정에 더 관심을 쏟는다."

"무용한 것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은 완전한 자유를 느끼는 떠돌이의 즐거움이다. (…) 예술이 자유로운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순수 상상력의 소산이며, 존재의 한 현상, 말하는 존재의 특이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상상한다는 긍정적 욕구로 산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정신적으로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김현을 잊지 않고 아끼는 자들에게 그는 영원히 살아있는 셈이다.)

"그들의 한국어는 토속적 한국어와 사변적 한국어를 변증법적으로 극복한 한국어였다. 더구나 그들이 본 세계는 사일구의 푸른 하늘이었다."

"참된 것은 고통 속에서 배태(어떤 현상이나 사물이 발생하거나 일어날 원인이 속에 생기다) 된다!"

"나는 타자다, 그러니까, 세계는 바뀌어야 한다."

"진실은 결국 진실화 과정 속에 있다. 진실 속에서 인간은 살 수가 없다. 인간은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 속에서 산다."

"나는 다시 내 유년기의 바다에 와 있었다. (…) 나는 모래밭에 주저앉았고 북해의 바닷물을 만졌다. 그리고 소리쳤다 '어머니'라고."

"내 사유의 주체는 내 육체이다." 행복한 책 읽기, 1987

사라짐, 맺힘(김현의 책 속에서 내 마음에 걸린 문장들을 옮겨본다.)


…… 자연스러운 자연은 인간이 그 자연을 마음대로 해석하게 한다. 인간은 그 자연을 마음대로 채울 수 있다. 19쪽


…… 친하다는 것은 아무 말을 나누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는 뜻이다. 21쪽


……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아파트가 하나의 거주 공간이 아니라 사고 양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중산층의 사고 양식이었다. …… 사람들이란 혼자 있을 때는 제법 사람 같은 생각을 하다가도 여럿이 있을 때는 금세 달라진다. 33쪽


……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게 만든다. 70쪽


…… 술은 말의 예비자이며, 말의 부피를 불리는 희한한 공기이다. 75쪽


…… 술이 인생의 무상함을 덮어주는 마취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술은 오히려 건조한 삶에 습기를 부여해 주고, 엷은 삶에 두께를 부여해 주는 고양제이어야 한다. 삶을 다시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우리는 삶을 부정하는 것일까? 술의 도움을 받는 문학이건 받지 않는 문학이건, 좋은 문학은 삶을 긍정시키기 위해 삶을 분석하고 부정하는 문학이다. …… 우리는 삶을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다. 80쪽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일이 그렇게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일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160쪽


프랑스의 지적 힘은 사회의 한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구석의 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것을 사회의 문제로 확대시키는 데 있다. 내가 알 게 뭐냐가 안 되는 것이다. 164쪽


세계가, 내가 없어도 내가 있을 때와 똑같이 활기를 띠고 진행되리라는 것을 느낄 때의 허무감. 173쪽


…… 정말 힘 있는 충격 효과는 사소한 것들의 집합에서 나온다.  224쪽


…… 피카소 미술관에서 내가 배운 것은 피카소의 예술이 끊임없는 예술에의 질문이었다는 사실이다. 243쪽


저항하는 예술가에게 복수하는 길은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능력을 기구화시켜 버리는 길이다. 나는 그때 투철하게 미셸 푸코가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처럼 영리한 계층은 없다고 말한 발언의 배후를 읽어낼 수가 있었다. 자코메티를 정말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조각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에를 가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현대미술관을 나오면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자문하였다. 276쪽


"조각은 독창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필요로 한다." 로댕 279쪽

이전 07화 길 위에서 만난 문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