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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들래 May 01. 2023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

정적만이 가득한 아스타포보 기차역 대합실 무대가 보인다. 공연 시작 5분 전쯤인가?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면서 대합실 천막 뒤로 톨스토이가 책상에 앉아 타이핑하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후 피아노와 첼로가 라이브로 연주되고... 정시에 공연이 시작됐다.

지막 열차를 기다리던 톨스토이가 깊은 상념에 빠져있고. 그 뒤로 고통의 침묵을 깨고 울려 퍼지는 괘종시계 소리가 둔탁하게 울린다. 여행 가방을 들고 안나 카레니나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입장한다.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는 긴 침묵 속. 그들 각자 숨겨왔던 사랑의 의미를 고백하기 시작하는데...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 안나 카레니나와 종교적 구원의 길을 탐구했던 작가 톨스토이의 대화가 시작된다. 과연 이 두 사람은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을 수 있을까?


공연이 끝난 후에도 텅 빈 간이역에서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던 두 사람의 고백이 귓전에 맴돌더라.


문학과 클래식, 뮤지컬을 접목시킨 작품이었지만 내가 원한 것은 정통 연극이었다. 정동환의 대사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피아노 반주가 오히려 방해가 될 정도로 컸다. 그럼에도 명불허전 정동환의 대사 전달력은 피아노 소리까지 잠식시켜 버릴 정도로 분명히 들렸다.


그러나 안나와 안나의 생각 대사는 음악소리에 묻혀서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을 때가 더러 있었다. 음악을 배제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그냥 높낮이를 조정할 수 있는 음향 정도만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라이브 연주가 오히려 내겐 공연의 방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라이브 연주를 빼고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로만 채워진 무대를 상상해 봤다. 훨씬 나았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전반적으로 아쉬웠으나 정동환의 톨스토이는 만족스러웠다.


개인적으로 안나 역으로 분한 정수영 배우는 영화배우 이혜영의 모습과 너무 오버랩되더라. 제스처도 그렇고 대사 치는 것도 그렇고 그녀의 연극은 처음이라서 뭐라 말하기가 그렇다. 원래 그녀의 대사톤이 그런 건지 안나 캐릭터로 설정해서 톤이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녀의 작품을 하나둘 더 만나보면 되겠지. 그녀에 대해 정보를 좀 찾아보니 이미 2년 전에 비슷한 작품으로 안나 카레니나를 열연했었다. 


이번 공연에서 브론스키에게 몰입하는 게 좀 어려웠다. 브론스키에 까레닌에 어느 순간 톨스토이의 젊은 시절로 분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솔직히 톨스토이로 분한 정동환만 보였다. 내가 정말 만나고 싶었던 '레빈'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살짝 건드려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나마 내가 원작에서 가장 좋아하는 제3부에 내용을 다뤄줘서 인상 깊었다.


"…… 비 오듯 흐르는 땀이 그의 몸을 서늘하게 식혀 주었고, 등과 머리와 걷어붙인 팔꿈치로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은 그의 노동을 한층 더 굳세고 완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게 되는 무의식 상태가 점점 더 잦아졌다. 낫이 저 혼자 풀을 베었다.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한결 더 유쾌한 순간이 있었으니, 풀베기 구역 끝자락이 잠겨 있는 강가에 다다랐을 때, 영감이 무성하게 자란 축축한 풀에 낫을 문지른 뒤 강물에 강철 날을 헹구고는 숫돌을 담는 양철통에 강물을 떠다가 레빈에게 마시라고 건네주었다.


  「자, 내 끄바스(러시아인이 즐겨 마시는 전통 음료. 호밀로 만든 엿기름에 물을 섞어 발효하여 만든다) 한번 맛보시지요! 맛이 썩 괜찮습니다!」 그가 눈을 찡긋하며 권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레빈은 양철통의 녹슨 향이 나고 풀잎이 둥둥 떠다니는 이 따뜻한 강물처럼 맛있는 음료를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이어서 행복하기 그지없는 느긋한 산책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동안에는 손에 낫을 든 채 흐르는 땀을 닦거나 가슴 한가득 심호흡을 하면서 풀베기꾼들의 기다란 행렬과 주변의 숲과 들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자꾸자꾸 풀을 베어 갈수록 그는 더욱더 자주 무아지경의 순간을 맛보았다. 그 순간에는 두 팔이 낫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낫 자체가 생명력 넘치는 그의 육신, 스스로를 자각하는 그 육신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러면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규칙적으로 되어 가는 것이었다.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안나 카레니나, 상권, 4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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