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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나 Sep 18. 2022

고달픈 외노자의 삶

남의 나라에서 물난리 

24시간 로비 직원이 상주하는 고층 아파트에서 지내게 되었다. 

커다란 매트리스가 있는 안방과 화장실, 작은 주방겸 거실 그리고 싱글침대가 있는 여분의 방 하나가 더 있다.

크지는 않지만 혼자 살기엔 충분한 공간이다. 

이런 괜찮은 집에서 오랜만에 한시적 독립을 하게 되었는데, 

...2주째 싱크대와 세탁기를 못 쓰고 있다. 

한 열흘 전, 

그러니까 도착한 지 1주일쯤 되었을 때부터 악몽이 시작되었다. 

빨래가 쌓여서 세탁기를 돌려놓고 거실 식탁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베란다 통창으로 보이는 저 밖은 반짝반짝 하길래 

갑자기 아파트만 전기가 나갔구나, 싶어서 어둠속에서 20분을 기다렸다.

건물 통째로 전기가 나갔다면 엘리베이터도 움직이지 않을테니까 그냥 기다려보자 싶었다. 

그러다 베란다로 나가 아래를 내려다 봤는데...응? 

1층 야외 상가는 알전구가 반짝이는데?  

...아파트 전체가 아니라 이 집만 나간거 같은데?  

복도를 나가보니 훤하다. 

!!

뭐야, 이 집만 전기가 나간 게 확실한데? 

이게 뭐지 싶어서 일층으로 내려가 로비에 도움을 청했다. 

잠시 후에 똑똑!(이 집엔 초인종이 없음ㅋ)엔지니어 분께서 문을 두드리셨다.

방금 다시 수습했으니 될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만국 공통어 오캐이 표시에 끄덕하시고 내려가셨다. 

다시 불이 켜지고 에어컨이 켜지고 세탁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티비도 켜지지 않았다. 

...진정하고 살펴보았더니 공유기가 켜지지 않았다. 

핸드폰 충전기를 들고 콘센트를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어떤 콘센트는 충전이 되는데 어떤 콘센트에서는 충전이 되지 않았다.

하아-이걸 뭐라 설명하지.

다시 로비에 내려가서 번역기에 대고 이야기 했다. 

아까는 전체 정전이었는데, 이번엔 어떤 콘센트는 되고 어떤 콘센트는 안된다고. 

다행히 바로 이해한 직원분께서 다시 엔지니어가 올라갈 것이라 말해주셨다.

조금 후에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엔지니어 분께서 오셨다.

두꺼비집을 찾아서 스위치를 올려주시니 그제서야 인터넷이 켜졌다. 

고맙게도 번역기를 열어서 설명해 주셨다. 

전기 사용량이 많으면 이렇게 된다고, 양을 조절해야 한다고 하셨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엔지니어 분이 가신 지 10분 후, 

또다시 전기가 나갔다. 

이미 학습된 나는 직접 두꺼비집을 열어 스위치를 올렸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이놈의 세탁기...

회사에서 숙소를 구해줄 때, 세탁기가 있어서 이집을 선택했다는데(세탁기가 설치되지 않은 아파트가 많았다고 했다)이놈의 세탁기가 원흉이었구나. 

하지만 여행자인 나님은 견딜 수 있지! 

총 전기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에어컨을 껐다. 

거실 불도 하나만 남기고 꺼버렸다. 

혹시 몰라서 티비도 끄고 충전된 아이패드로 영상을 틀었다. 

그리고 세탁기를 다시 돌렸다. 

10분을 있어봤더니 세탁기가 순조롭게 돌아갔다. 

안심하고 식탁에서 계속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

.........갑자기 발 밑이 차가웠다.

어딘가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와씌, 이게 뭐지?!?!?!?!

갖다 버리려고 했던 전 주인의 걸레인지 행주로 대충 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에어컨도 꺼서 더운데 몸을 움직이며 물을 닦아내니 더 더웠다. 

그 와중에도 

바닥이 카펫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을 안한다고 이렇게 몸을 쓰게 만드나 싶었다. 

30분을 넘게 물을 닦아내니 좀 진정된 것 같았다. 

에어컨을 켜고 싶었지만 세탁기가 끝날때까지 더 이상의 전기를 쓰면 안될 것 같았다. 

지쳐서 소파에 앉아 세탁기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 

30분 넘게 바닥의 물을 닦아냈건만...

다시 물이 새기 시작했다! 

말랐던 거실에 다시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ㅆㅂ.................육성으로 욕이 나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세탁기에서 빠져나가야 할 물이 거실로 넘치는 것 같았다. 

이미 시작된 세탁기 스핀은 계속해서 물을 뱉아냈고 

그 물은 계속 거실로 빠지고 있었다. 

세탁기를 껐다. 

그러나 빨래에 물기가 남아서인지 세탁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 저대로 두면 내 옷이 상하는데...ㅠㅠ 어떻게해도 문이 열리지 않아 빨래를 구할 수 없었다.

 

세탁기가 멈췄으니 물은 더이상 새지 않았지만 

거실 바닥은 이미 물바다가 되었다. 

화장실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왔다. 

스스로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너무나 열이 받아서 저 바닥을 다시 치울 순 없었다. 

밤 11시가 넘어 너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현지 직원에게 연락을 했다. 

사진을 본 그녀 또한 놀라서, 집 계약을 맡은 부동산과 아파트 매니지먼트에 바로 연락을 해 주었다.

더이상 바닥청소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날 오전에 사람을 보내준다고 하길래 물마다를 그대로 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안방까지 물이 들어오진 않았다.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ㅠ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었더니 

바닥에 흥건하던 물이 다 말라 있었다.

?????????????????

이 집이 이렇게 건조했나?

내 건강은 괜찮은거겠지? 그래, 뭐 습한 것 보단 낫겠지? 

집 열쇠를 로비에 맡기고 출근을 했다.

저녁에 집에 와 보니 무언가를 고치긴 했다고 했다. 

다시 싱크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근데 세탁기 안에 젖은 빨래가 있는데 ㅠㅠ 

그런데 또 다시 범람할까봐 세탁기를 돌릴 수는 없었다. 

다음날, 

조금 두려웠지만 큰 맘을 먹고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에어컨을 끄고, 불을 하나만 남기고, 티비를 끄고, 충전기를 뽑고 세탁기의 빠른코스 버튼을 눌렀다.

15분 코스니까 그 안에 무슨 일이 있겠어 싶었...................

................다시 세탁기 스핀이 작동하자 물이 거실로 빠지기 시작했다.

두번째라 놀랍지도 않았다. 

어차피 범람한다면 저 물이 거실만 적셔야 할텐데, 안방으로 들어오면 안되는데 싶었다.

쓰고 싶지 않았던 전 주인의 대걸레를 들고 바닥의 물을 베란다로 유도했다. 

세탁기에서 물이 빠져야 빨래를 꺼낼 수 있으니 스핀을 멈출 수 없었다. 

로비에 내려간 사이에 물이 방으로 들어올까봐 세탁기가 꺼지기 전까진 집을 비울 수도 없었다. 

악몽의 15분 후에 세탁기는 꺼졌고, 일단 빨래를 꺼내 말릴 수 있었다. 

바닥은 다시 물바다가 되고 

나는 그녀에게, 그녀는 부동산과 아파트 매니지먼트에 다시 연락을 했다.

...고쳤다면서요. 

하아, 이번에도 물바다를 외면하기 위해 방문을 닫았다. 

이 나라가 나보고 나가라고 시위를 하는 건가 싶었다. 

다음날 아침, 

똑똑! 엔지니어가 문을 두드렸다. 

물바다를 본 엔지니어도 놀란 것 같았다. 

이미 포기한 나는 안방 문을 닫고 출근 준비를 했다. 

안방 문만 잠그고 거실은 그들에게 맡겼다.  

계속 무언가를 하는 것 같길래 

열쇠를 로비에 맡겨달라고 하고 그냥 출근을 했다. 

어차피 나는 말도 못 알아들으니 그들이 회사로 연락하겠지, 싶었다. 

무언가를 고쳤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세탁기를 당분간 쓰지 말라고 했다. 

싱크대는 써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했다. 

대단한 설거지도 아니고, 접시 몇개와 컵을 씻었다.

.................................다시 싱크대 바닥으로 물이 새기 시작했다. 

세탁기 배수관이 문제가 아니었던거야?

싱크대가 문제였던거야? 

아니면 세탁기 배수관도 문제고 싱크대도 문제인거야? 

고쳤다며? 고쳤다며!!!!!!!

그렇게 해서 또 다음날 엔지니어가 왔다.

이번엔 회사에서도 이야기 해 주겠다고 집으로 와 주었다.  

현지인이 있으니 조금 더 든든했다. 

싱크대에서 물을 틀자 바닥으로 물이 새나왔다. 

이번엔 물이 새는 장면을 엔지니어가 직접 목격하게 되었으니 

무언가 확실한 방법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로비에도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출근을 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거의 열흘 째, 

뾰족한 대책이 없다.

싱크대와 세탁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아래층 배관을 같이 봐야 하는데, 밑집이 현재 부재중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일단 밑집이 와서 배관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집에서 요리를 하진 않지만,

그래도 과일을 깎아먹거나 간단한 끼니를 때우고 식기를 씻어야 하는데

취사가 안되는 호텔처럼 화장실 세면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 매우 불편하다. 

오늘은 

2주 넘게 쌓여있던 빨래더미를 세탁소에 맡기고 왔다.  

만원을 내고 돌아오는 길에 조금 홀가분한 생각이 들었지만, 

멀쩡한 세탁기를 두고 생돈이 나간다는 생각에 귀찮고 아깝고 짜증나서 돌겠다.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니 세면대만 쓰면서 좀 기다려볼 수도 있는데 난 왜 이리 짜증이 날까. 

직접 세탁기를 돌리지 않고 세탁소에 맡기니까 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건데,

내가 지금 세탁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더 짜증을 내는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며 더욱 더 화가 난다.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내(우리 둘의) 고민의 대부분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낸 적이 있는데, 

이 생각이 떠오르니 좀 씁쓸해지면서 또 한번 짜증이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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