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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첼 May 25. 2022

지하철을 보면 그 도시가 보인다

(1) 동아시아 

  출근길에 문득 서울 지하철 환경에 감사함이 들었다. 평소에 마을버스를 타고 집 근처 2호선으로 환승해 출근한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방향으로 가는 마을버스 배차간격이 길어서 가까운 5호선을 타고 2호선으로 환승해서 가는 계획을 세웠다. 2호선 타고 한 번에 갈 것을 5호선에서 2호선으로 한 번 환승을 해야 했기 때문에 번거로운 출근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5호선 승강장은 지하 깊숙이 있어 내려가는 길이 길긴 했지만 전체 시간은 버스보다 훨씬 적게 걸렸고 환승도 생각보다 금방이었다. 역시 서울은 버스보다 지하철이라는 생각이 들며 이런 고퀄리티 공공 서비스를 단돈 1달러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지하철 타는 것을 좋아했다. 여섯 살에 처음 서울에 이사와 김포공항에서 천호까지 가면서 느꼈던 그 끝없는 지루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김포공항-천호는 솔직히 아직도 너무 멀다. 9호선 급행이 없었다면 송파/강동 주민들에게 공항 이용은 여전히 고역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하철 표를 사면 매표소 직원분이 종이로 된 노선도를 줬는데 항상 지하철에서 그걸 보며 역 이름들을 외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어플에 출발 역과 도착 역을 입력하면 최적 경로를 바로 알려주지만 그때만 해도 일일이 찾아갔기 때문에 종이 노선도를 보면서 어떤 루트로 가야 빨리 갈 수 있을까를 혼자 많이 고민했다. 


  어른이 돼서 전 세계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면서도 그 도시에 지하철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꼭 확인했던 것 같다. 더럽고 복잡하기로 유명한 뉴욕 지하철, 도둑이 많은 파리 지하철도 타보고, (의외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헝가리 지하철도 봤다. 확실히 지하철이 깨끗하고 편한 곳은 동아시아 도시들. 싱가포르, 홍콩, 대만이 서울과 비슷한 모습의 지하철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




1. 싱가포르 지하철 _ MRT


싱가포르 MRT 노선도

  싱가포르에선 지하철을 subway라는 표현보다 대부분 MRT라고 부른다. 위 지도는 2022년 가장 최신 노선도인데 확실히 내가 살던 2016년보다 역도 많아지고 노선도 몇 개 추가되어 서울 사람들이 익숙한 여러 줄이 섞여있는 "지하철 노선도" 모습과 비슷해진 게 느껴진다. 싱가포르는 서울만 한 사이즈의 도시국가이고, 대부분의 상업 시설이 섬의 아래쪽 가운데 (지하철 노선도에서 보면 노란색 원의 아래쪽 - 환승역도 가장 많다)에 모여 있어서, 사실 MRT의 역할은 싱가포르 섬 곳곳에 사는 사람들을 저 구역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City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MRT가 있으면 비교적 쉽지만, 원 바깥의 지역들끼리 이동은 버스가 아니면 MRT로는 쉽지 않다. 싱가포르 MRT를 이용하던 중 가장 놀랐던 것은 환승이다. 서울 지하철도 환승이 편한 축에 속하지만 싱가포르의 몇몇 환승역은 그 편함의 정도가 정말 정교하게 잘 설계되어있다. 서울 지하철은 각 호선들이 순차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환승을 하려면 다른 노선의 승강장으로 이동해야 하지만 (이래서 노원역 4-7호선 환승, 신당역 2-6호선 환승과 같은 말도 안 되는 구간들이 발생한다) MRT의 경우 초반에 동시 개통된 노선들 (초록색, 빨간색 등)은 환승까지 고려해서 플랫폼이 설계되어있다. 초록색 City Hall 역에 내리면 반대편에 있는 노선은 초록색 반대방향 행 열차가 아니라 빨간색 열차가 있는 식으로 말이다. 서울 지하철로 표현하자면 2호선 시청역에 내렸는데 반대편에 있는 열차가 2호선 을지로입구행 열차가 아니라 1호선 인천행이 있는 그런 느낌이다. 


싱가포르의 번화한 역 중 하나인 Raffles Place

  내가 다니던 학교는 Pioneer 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로 싱가포르에서는 East-West line (초록색 노선)을 이용했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싱가포르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City (미국에선 다운타운, 한국에선 시내)에 나가려면 무조건 MRT를 타야 했다. (Pioneer에서 City까지 가는 버스도 없었다.) 거의 나라를 횡단하는 셈이었는데 알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3-4번은 탔다. Raffles Place나 City Hall에서 레드라인으로 환승해서 Orchard로 갔는데 위에 Raffles 역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 관광객이라면 사실 99% 저 노란색 노선 안쪽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2. 홍콩 지하철 _ MTR 


  싱가포르 MRT와 홍콩 MTR은 이름부터 헷갈린다. 홍콩은 Mass Transit Railway이고 싱가포르는 Metro Rail Transit이다. 크게 차이가 와닿지는 않는다. 슬쩍 보면 노선도도 비슷해 보이긴 하는데 역 이름을 자세히 보면 뭔가 다르긴 다르다. 싱가포르 역 이름들은 말레이어에서 유래한 이름들이 많은 반면 홍콩은 광둥어 이름을 발음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홍콩의 MTR 노선도

  홍콩 지하철도 서울,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정말 깨끗하고 편리하고 빠르다. 가서 가장 놀랐던 것은 사실 다른 것 보다 에스컬레이터 속도이다.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서울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속도의 한 2.5배 정도 된다. 실제로 에스컬레이터에서 사고도 많이 나서 기사로 나오기도 한다고 한다. (성격 급하기로 정말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 한국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 속도는 느린 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긴 하다)


  막상 홍콩에서 인턴 할 때 기억을 되살려 보니 지하철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그때 홍콩섬 Sheungwan근처에서 생활하면서 빨간색 노선 거의 종점인 Kwai Hing 역으로 출근했는데 Central에서 환승 인파에 고통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홍콩 지하철이 뭔가 서울이나 싱가포르에 비해 열차칸 사이즈 자체가 작은 것 같다. 홍콩은 구룡반도와 홍콩섬, 그리고 여러 섬들 (공항과 디즈니랜드가 있는 란타우 섬, 가는 길에 있는 칭이 섬 등등... )로 구성된 지역이기 때문에 MTR도 MTR이지만 버스가 정말 잘 되어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홍콩-션젼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외근 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셩완에서 버스 타면 (우리로 치면 광역버스인 것 같다.) 한 번에 논스톱으로 가서 밖에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홍콩 칭이 섬을 건너는 길

  홍콩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MTR 대신 이용할 교통수단이 확실히 많다. 구글맵을 잘 이용하면 홍콩의 상징(?)인 2층 버스도 많고,  홍콩섬에서 구룡반도를 건너가려면 페리도 있고, 홍콩 섬을 여행한다면 MTR보다는 트램도 아주 괜찮다. 물론 시간 면에서는 MTR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다. 홍콩 섬의 동쪽에 있는 쿼리 베이 역에서 센트럴까지 MTR로 20분도 안 걸리지만 트램을 타면 한 시간은 넘게 걸린다. 그리고 트램은 에어컨도 잘 안되어 있기 때문에 일 년 중 열 달은 습하고 더운 나라에서 시간이 넘치는 관광객이 아니라면 굳이 선택하지 않을 옵션이긴 하다. 그래도 "아, 내가 지금 홍콩에 왔구나"를 몸소 느낄 수 있는 홍콩만의 매력이기 때문에 지금도 트램에서 맡던 홍콩의 겨울바람이 그립다. (여름 아님) 홍콩 MTR 글이었는데 버스와 트램 찬양으로 마무리한다. 


3. 대만 지하철 _ 첩운 (MRT)


  대만 타이베이 지하철의 정식 명칭은 첩운이라고 한다. 처음 알았다. 그냥 MRT라고 불렀던 것 같다. 타이베이 지하철도 다른 여느 동아시아 도시들의 지하철처럼 깨끗하고, 크고, 편리했다. 내가 타이베이에 갔을 때 80년 만의 강추위가 덮쳐서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많이 탔다. 80년 만의 강추위여도 서울의 추위에는 비할바가 아니었지만 (0도였다.) 대만의 따뜻한 겨울을 생각하고 옷을 챙겨갔기 때문에 정말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말을 체험했었다. 정말로 그때 대만엔 동사한 사람들이 많아서 뉴스도 많이 나왔다. 


타이베이 지하철 승강장

  대만 지하철에서 기억나는 건 사실 많지는 않다. 아시아 도시들 지하철이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 다 거기서 거기로 느껴지기 때문에 고작 일주일 있었던 타이베이에서 싱가포르와 홍콩, 서울만큼 엄청난 임팩트를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플랫폼에 있는 대기 선이었다. 서울 지하철만 해도, 특히 사람들이 많을 때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이 뒤섞여 복잡하다. 내리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타는 게 공중도덕이라고 배웠지만 모두가 정확하게 지키지 않을뿐더러, 나도 모르게 빈자리가 눈에 보이면 재빠르게 가서 앉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타이베이에서도 아마 이런 복잡함을 겪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해결책으로 독특한 대기선을 그려뒀는데 꽤 괜찮은 아이디어 같다. 지하철 문을 기준으로 양쪽에 사선으로 대기선을 그려뒀는데, 타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이 겹칠 일이 없었다. 일본은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대만의 거리를 걸으며 짱구에 나오는 동네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하철 승강장에서도 일본의 질서 정연함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넓게 보면 동아시아 도시들의 지하철은 깨끗하고, 편리하고, 빠르다. 전반적으로 도시 발전이 서구권의 대도시들에 비해서 늦었기 때문에 도시 인프라가 구축된 시기가 크게 오래되지 않아 아직 덜 낡은 것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도시들은 사회 인프라를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많은 보수 작업을 하는 것이 원인인 것 같기도 하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대표 공항 - 서울 인천공항, 싱가포르 창이공항, 홍콩 첵랍콧 공항 등- 전 세계 어떤 공항보다 깨끗하고 넓다. 서울 지하철도 그렇다. 주기적으로 지하철 역 보수 공사를 진행할 뿐만 아니라 열차 자체도 주기적으로 바꾼다. 오늘 탄 5호선도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디자인의 열차였다. 지하철도 항상 깨끗하고 편리하게 유지하는, 참 열심히 사는 동아시아 사람들이다 싶으면서도 이런 깨끗함에 (겉으로 보이는 것에) 단체로 큰 강박이 있는 문화권인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비슷한 아시아 지역 도시들도 자세히 보면 또 다르다. 지하철은 도시인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홍콩, 싱가포르와 서울 지하철의 가장 큰 차이는 개인적으로 요금체계라고 생각한다. 홍콩, 싱가포르는 서울/경기도 광역 수도권에 비하면 작은 지역이다. 요금이 (특히 싱가포르) 철저하게 거리비례로 측정되는데, 싱가포르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면 요금이 2016년 기준 4-500원 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 서울에서 광화문 근처에 살 때였는데 광화문에서 동대문 가는데 더 멀리 가는 사람이랑 큰 차이 없이 똑같은 요금을 내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은 경기도, 인천까지 포함한 수도권 지하철을 고려하면 전 세계에서 손꼽는 거대 광역도시이다. 싱가포르처럼 철저한 거리비례 요금을 적용한다면 먼 곳에서 서울 도심지역으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의 교통비 부담이 지금보다 더 가중될 것이다. 그런 사회상이 모두 반영된 것이 한 도시의 지하철 체계라고 생각한다. 


  다음 글에서는 서구권 도시들에서 이용한 지하철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아시아 도시에서는 생활한 시간이 길어서 좀 더 깊은 분석이 가능했지만 서양 도시들은 여행객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가 매우 얕을 것이다. 그래도 여행자의 시선도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에 기록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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