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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례 Sep 03. 2022

스물셋, 독일로 떠난 날

생애 첫 자취를 하이델베르크에서, 왜 독일이었을까

친구와 얘기하다 문득, 9월 1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딱 일년 전 스물세살, 교환학생으로 독일에 가려고 비행기를 탔던 날이다.

벌써 일년 전이라니.


공항에서 급하게 다음 학기 교환학생 추가신청을 하느라 정신 없었고(신청서 저장만 하고 등록을 하지 않아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5개월 뒤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던킨도너츠에서 새로 나온 우유크림도넛을 사먹으며 옆에 앉아 걱정하는 아빠에게 잘 살다 오겠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눈물의 (잠시) 이별, 이런 말이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아서 가족에게 신나게 팔을 흔들고 게이트에 들어선 순간 울컥해 눈물이 찔끔 났던 이 모든 장면과 감정이 세세하게 기억나는데

벌써 일년 전?




가족과 떨어져 살아본 적 없는 내가 스물셋 첫 자취를 독일에서 시작했다. 기숙사 신청 당시, 내 공간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또 한 공간에 오롯이 혼자일 때 느낄 외로움을 몰랐던 터라 무조건 1인실 기숙사를 신청했다. 싱크대와 냉장고, 화장실이 딸린 원룸 기숙사에서 살았다. 본가에 살 때처럼 (혹은 플랫메이트가 있을 경우처럼) 문 너머 사람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혼자 기숙사에 있으면 저녁시간 가끔 들리는 밖에 지나가는 사람 말소리, 아침 6시부터 기상하는 사람들이 블라인드 올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자주 밖에 나가 돌아다녔고 SNS를 들락거렸고 보지도 않는 유튜브 브이로그를 틀어놓았다. 단절된 기분일 때마다. 해외에서 혼자 살며 내가 느낀 외로움은 생전 처음 겪은 모양과 깊이의 외로움이었다.

그러나 외로움을 느낀 만큼 학교에서, 여행지에서 좋은 인연을 만날 때마다 그 충족감은 배가 되었다.

매일이 내 한계를 마주하고, 그 한계를 깨는 하루하루였다.




나는 왜 독일로 갈까?
나는 왜 독일에 있을까?
나는 왜 독일로 갔을까?


떠나기 전, 독일에서, 한국에 돌아와 가다듬지 못한 상태로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다. 당시 몇가지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일부는 현실적인 이유이고 일부는 내가 억지로 끼워맞춘 이유다.


1. 사회학 전공 공부

: 나에게 전공 공부는 짝사랑같았다. (외국인 친구들에게 늘 원웨이러브라고 내 전공을 소개했었다.) 어디가서 사회학 전공이라고 명함도 못 내미는 지식을 가진 일개 학생인데다가 전공 성적도 꽤 좋은 편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땐 사회과목 선생님들과 친했었고 성적도 좋았다. 그런데 대학은 달랐다. 대학생이 되니 수업내용, 팀프로젝트는 정말정말 재밌는 과목인데 성적이 좋지 않았다. 난 전공이랑 정말 안 맞는 걸까? 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을까? 나는 포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전공에 '질척거리고' 있었던 거다. 그래, 사회학으로 유명한 독일에서 교환학생을 마지막으로 포기하자. 이런 심정으로 독일을 선택했다.

막상 독일에서 공부해보니 짝사랑이 맞았던 걸로... 하하


2. 저렴한 물가와 인근 국가로의 접근성

: 독일은 생활 물가가 저렴하다. 외식을 줄이고 집에서 조리해먹는다면 식비를 아낄 수 있다고 들었었다.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는 수식어가 늘 붙는 이런 점이 독일을 선택하는 데 한몫했다.

유럽 여행을 초등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나로서 공부하러 간다지만 여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은 기차로 쉽게 다른 국가에 갈 수 있다. 실제로 친구 말로, 같은 반 학생이 수업에 캐리어를 끌고 왔다가 바로 여행 갔고 심지어 교수님이 자연스럽게 좋은 여행되라며 인사를 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여러 국가가 인접한 독일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3. 어떻게... 인연이?

: 억지로 끼워맞춘 이유다. 좋아하는 뮤지컬인 '헤드윅'에서 헤드윅이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는 동독에서 시작한다. 헤드윅 뮤지컬을 보며 왜인지 추운 겨울 베를린 이미지가 그려졌고, 춥고 황량할 것 같은 내 상상이 맞을까 베를린은 실제로 어떻게 다를까 무척 궁금했었다.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관심가지고 구입했던 의류 브랜드 '마뗑킴' 대표님이 사업 전 베를린에서 잠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분에게서 보여지는, 활자너머 느껴지는 에너지와 일에 대한 열정, 가치관을 배우고 싶었다. 일종의 롤모델이 지나쳤던 도시에 나도 간다니,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실제로 내가 베를린을 여행할 때 그 분 남편분이 베를린에서 전시를 잠깐 했었고 방문해서 전시도 보고 대표님도 만났었던 일이다.


이런 우연과 필연이 섞여 내가 독일로 간다고 생각했다. 기막힌 이유라고 생각했고, 그것들이 또 어떤 길로 나를 이끌지 말도 안 되는 기대를 가지고 막연하지만 독일에서 겪을 내 미래는 찬란하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독일에서 지내며 여행할 때, 최악의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그런 기대가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대였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런데 한편으론, 최악의 상황에서 알 수 있었던, 느낄 수 있었던 사람과 감정이 결국 2022년 9월 1일 나로 이끈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다.




차별적인 말 그리고 갑자기 취소된 버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해둔 공항 근처 호텔로 갔다. 큰 캐리어 하나와 배낭, 숄더백을 들고 프랑크푸르트 시내까지 갈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처음 유럽에 갔던 것이라 너무 무서웠다. 긴 비행과 무거운 짐에 지친 몸을 푹 쉴 생각에 기대했다. 그런데, 체크인하던 남자 직원이 여권에 적힌 내 이름 성 GIL 을 '쥘'이라고 발음하며 'American gil?' 이라고 물으며 비웃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를 비웃음에 기분나빴지만, 그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몰랐고 그저 정색하며 한국인이라고만 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잘못됐는지 따박따박 따질 수 없는, 보이지 않지만 이방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차별들은 그날을 시작으로 빈번히 일어났다. 당시엔 '내 독일 생활 시작은 왜 이러냐'며 그 순간에 휘둘려 앞으로 독일 생활이 불행할 것이라고 싸잡아 생각했었다. 동시에 순탄치 않을 것이란 걸 직감했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며 다른 직원에게 전날 일에 대해 말했고 상당히 기분 나빴음을 표현했다. 무언가 바뀔 것이란 기대는 없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 것보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그것에서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완벽한 언어로 구사할 순 없지만 '타지인으로서 느끼는 것'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됐다' 고 스스로 다독이며 새벽 일찍 공항 근처에 있는 플릭스버스 정거장으로 나섰다. 입국 한달 전부터 불안에 떨며 꼼꼼히 세운 계획은, 공항 호텔 숙박 - 공항 근처 플릭스 버스로 하이델베르크까지 직행 이었다. 새벽공기를 마시며 공항에서 플릭스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초행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새벽에 드르륵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갈림길에서 유일하게 마주친 사람이 정거장 가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새벽공기를 마실 때마다 두려움과 설렘이 반복했다. 정거장에는 나와 다른 무리, 모녀가 있었다. 전날 겪은 지나친 관심에서 기인한 차별적인 말이 무색하게 드넓은 정거장에선 캐리어와 배낭을 맨 동양인 여자애에게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버스가 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정거장엔 다른 곳으로 향하는 버스만 왔다갈 뿐이었다. 옆에 있던 모녀에게 물어보니 종종 늦는다며, 곧 기다리면 올 것이라고 대답해주었다. 불안해진 마음에 이메일을 들어가봤는데, 전날 내가 화가 난 상태로 잠들었을 때 내가 타려던 플릭스버스가 취소되었다는 메일이 와 있었다!

플랜B가 나에겐 없는데.

오로지 직행인 플릭스버스만 믿고 공항에서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다른 행선은 찾아보지 않았었다. 다급해져서 우선 인스타그램으로만 연락하던 버디에게 어떻게 가냐고 연락을 했고, 내가 가려던 학교에서 이미 수학 중인 분께 디엠을 보냈다. 그런데 새벽이니 둘에게 답이 올 리가.

당시에 얼마나 마음이 초조했으면 어떻게 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건, 급하게 검색을 했고 역 안내데스크에 물어서 '중앙역'으로 가야한다는 걸 알아냈던 것 정도다. 큰 캐리어를 들고 계단으로 힘겹게 내려가 티켓발권을 해야했는데, 방법을 전혀 몰랐다! 위기에 닥치면 용감해지는 걸까, 아무나 붙잡고 어디서 티켓을 끊는지 물었더니 본인도 모르지만 파업때문에 지금 오는 열차 다음은 엄청 늦게 올 것이라고만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초조해져서 주변에 있는 아저씨를 붙잡아 물어봤더니 티켓발권기까지 데려가서 발권을 도와주었다. 바로 열차가 왔고 도움 덕에 무사히 탈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까지 가면서 새로 중앙역에서부터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플릭스버스를 끊었다. 비둘기가 정말 많은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내렸고 새벽부터 온 신경을 썼더니 너무 배가 고팠다. 아는 맛, 스타벅스로 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들고 플릭스버스 정거장으로 갔다.

이 길이 맞나 아무리봐도 정거장이 보일 것 같지 않은데, 짐은 또 왜이리 무겁고 바닥은 또 왜이리 울퉁불퉁한지, 중앙역까지 오는 게 두려워서 피하려고 공항에서 바로 플릭스버스를 타려했던 건데 돌아돌아 여기로 오다니.


'아, 그냥 한국 가고 싶다...'


속으로 온갖 불평을 하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더니 플릭스버스 정거장이 나왔다.



우왕좌왕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오는 길에 해가 완전히 떴고, 플릭스버스에 탑승하니 버디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미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이지만, 도와주려는 그녀 마음이 고마웠다.


안녕 하이델베르크


플릭스버스는 정거장이 정거장같지 않은 곳에 있다. 짐칸에서 캐리어를 꺼내려는데 너무 무거워서 못 꺼내고 있었더니 같이 버스에 탑승했던 한국인분이 꺼내는 걸 도와주었다. 나도 모르게 한국말로 감사 인사를 하고 정신차렸더니 이게 무슨... 정거장같지 않은 허허벌판에 내려주다니!

길을 물어보려고 했는데 도와주었던 한국인 여성,남성분 커플은 저멀리 가버린 상태였다.

당시엔 구글맵을 사용할 생각을 못했고, 버디가 직접 지도에 표시해서 보내준 사진만 보고 도로로 나왔다.


낯선 도로와 낯선 사람들, 캐리어 끌고가는 동양인 여자애를 어떻게 볼까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버스 티켓을 사야했는데 사용법을 몰라서 또 주변에 아무나 물어보았다. 움츠러들었던 것치곤 생존을 위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는 데 익숙해졌다.

사람들이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가끔 캐리어를 들어주는 매너 좋은 분도 있었다. 그들의 친절함과 매너에 정말 고마웠다.



기숙사 카드키를 받고 하우스마이스터를 만나 서류를 작성하고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서니

...

덩그러니 방 가운데 모여 있는 책상,침대,옷장이 보였다.

이것들을 내가 다 옮겨서 배치해야 하나?

새벽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캐리어를 끌고 온 나에게 혼자 해낼 자신이 없었고, 지인과 버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 청소를 좀 하려고 했는데 1인실이었던 기숙사에는, 이불도 청소 도구도 없었다.


당장 오늘 밤은 뭘 덮고 자야 되지?

우선 밖으로 나갔다.

기숙사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마트에 어떻게 가냐고 물어보고 도보 15분 거리를 걸어서 청소용품과 이불대신 급하게 쓸 담요 이것저것 사서 기숙사로 걸어 돌아갔다. 버스 노선, 타는 법도 몰라서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다녔다.

청소를 하고 있으니 버디 S와 한국인 지인C가 와서 가구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S 웰컴키트라며 나에게 독일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선물해주었다. 고마운 S.



C를 따라 저녁을 먹으러 가는 비스마르크 광장은 너무 길었다. C는 '처음엔 그렇게 느껴도 나중엔 별로 먼 거리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C는 나를 아이리쉬 펍에 데려갔다.

하루동안 많은 일을 겪고 먹은 햄버거와 감자튀김.

C의 말을 듣는 동안 머릿속에서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나 여기서 잘 살 수 있을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멘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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