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 그리고 D-DAY
#00, D+7 그리고 D-DAY
한국으로 돌아온지 일주일 째 되는 날의 이야기와 유럽으로 떠나던 그 날의 이야기.
D+7
유럽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째다. 7일 전 이 시간엔 마지막 도시였던 로마 한인민박 침대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던 동행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며 카톡을 주고받다가 잠이 들었다. 그게 참 엊그제처럼 생생하다가도 마치 내가 꿈을 꾼 듯이 희미한 느낌이기도 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름 바쁘게 지냈다. 입국하자마자 당일에 친구들을 만났고, 다음 날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다음 날은 또 일하던 매장에 찾아가 선물 세례(나는 거의 산타 할아버지 수준이었다.)를 하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시차 적응에 실패하고 아침 아홉 시에 잠들어 오후 2시에 일어나고 있으며, 긴장이 풀린 탓일까. 갑자기 찾아온 감기 몸살로 이틀을 넘게 끙끙 앓다가 6일 차가 된 날에서야 핸드폰과 똑딱이 속에 잠들어 있던 사진과 동영상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일하는 곳으로의 컴백은 한 달 정도 남았고, 나에게 남는 것은 시간이고 부족한 것은 돈이었다. 놀 때 사진 정리도 후딱 해치우고, 동영상 편집도 다 끝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매번 내 인생은 이상하게 자꾸만 시트콤 같이 전개되고 만다. 노트북이 망가졌다. 동영상 편집을 할 수 없다. 하. 그럼 난 어떤 식으로 내 유럽을 정리해야 할까.
그러다 생각난 것이 출국 전에 만들어 둔 블로그였다. 나름 여행을 다닌다고(사실 여행보단 그냥 나들이 수준이 더 많긴 하다.) 생각한 편이라 여행을 다니면서 일어난 에피소드들을 적어둘 곳이 필요했다. 그래, 이런 걸 여행 기라고 하지. 그 여행기를 모아둘 곳이 필요해서 여기 블로그를 개설하게 되었다. 스무 살 때부터 3년 간 꾸준히 하던 N사 블로그가 있었지만 한참 연애를 하면서 남자친구와의 추억을 잔뜩 올렸던 블로그는 이별과 동시에 운영을 중단했다. 딱히 이별이 중단의 주된 이유는 아니었지만 만사가 귀찮고 허무해서 포스팅을 뜸하게 하던 것이 그대로 이어졌다. 메인에도 글이 걸려서 방문자 수가 하루에도 천여 명이 넘게 들어오던 블로그였지만 3년 동안(이렇게 되면 내 나이가 들통 나는 거 같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보려나 싶다.) 방치하니 폐가처럼 변해 버렸다. 그런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 결국 나름 폐쇄적인 블로그를 개설하게 되었으나, 막상 블로그가 운영하기 조금 어려운 곳이다 보니 여기에 또한 글 쓰는 것이 살짝 망설여졌다.
하지만 글은 써야지. 내 추억들이 언제까지 내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정말 우연히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페이스북 친구 중에 어린 나이에 여행을 많이 다니며, 여행 작가가 꿈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이 곳에 쓴 글을 링크해서 올린 것을 보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이 어떤 곳인가 살펴본 후엔 이 곳이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단 작가 신청은 하지 않았지만 글부터 쓰고 보는 중이다.
사실 유럽 말고도 아직까지 못 쓴 여행지 일기가 많다. 작년 이맘 때쯤 다녀온 홍콩이나, 올해 2월에 다녀온 제주도, 그리고 3월에 다녀온 일본이 남아 있지만 가장 최근에 갔다 온 유럽부터 냅다 쓰는 중이다. 어차피 내 여행기는 사실 픽션도 조금씩 섞어서 소설처럼 쓸 예정이라 기억이 퇴색되면 될수록, 추억 보정이 더해지면 더해질 록 더 좋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유럽 여행기를 다 쓰고 나면 다른 여행지들은 다시 천천히 작성할 예정이다. 그리고 유럽은 써야 할 이야기가 워낙 많기 때문에 미루면 미룰수록 영영 완성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유럽부터 손을 대는 중이다.
여기까지가 한국으로 컴백하고 일주일 째 되는 날의 이야기. 사실 쓰고 싶은 내용은 더 많지만 이 글은 유럽 여행기이므로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글을 마무리할 때 보태서 써도 될 것 같다. 사실 이 다음 내용의 배경도 유럽이 아니다. 여전히 배경은 한국이다. 잠깐 넘어가면 경유지였던 홍콩정도일까. 그러니까 이 글이 00편인 것이다.
D-DAY, 2015.09.20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유럽 여행, 디데이. 주변인들의 걱정을 가득 안고 그렇게 나는 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 사실 유럽에 가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가 정말 유럽을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아니 상상은 매일 했지만 아무튼 실현 가능성이 정말 낮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게 되었다. 물론 떠나기까지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스무 살 때부터 유럽을 꿈꿔왔다. 스무 살 때 유럽을 가고 싶었던 이유는 정말 단순했다. 그냥 저 멀리 서양을 가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22살이 되었을 무렵엔 그냥 서양이면 다 좋을 거 같아서 뉴욕도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25살이 되었을 때, 일하던 매장 상황이 안 좋아져서 투잡을 뛰게 되었고 그러다 알게 된 곳이 맥주 바켓이었다. 세계 맥주를 파는 술집. 그 전까지 나는 소주보단 맥주, 막걸리. 술은 곡주지! 라는 나름대로 알콜 취향을 구축해왔고, 21살 때 처음 맛본 세계 맥주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때 먹었던 게 호가든이랑 에델바이스 그리고 머드셰이크 초코였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카스, 하이트만 알았던 나에게 그 맥주들은 정말 신세계였고 그 이후로 나는 세계 맥주를 아주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었다. 그 이후 맥주 바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일하면서 여러 종류의 맥주를 맛 볼 기회를 자주 접하게 되면서 나는 맥주의 매력에 더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 여행 동기를 굳히게 되었다. 현지에서 맥주를 먹고 싶다! 훗날 저 이유는 유럽에서 만난 사람들이 왜 유럽에 오게 되었냐며 묻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동기가 되었다.
맥주 말고도 유럽에 가고 싶은 이유는 또 있었다. 유럽 가면 꼭 초콜릿도 먹고, 하리보 젤리도 사야지. 지금은 모으는 걸 중단했지만 독일제 장난감인 플레이 모빌도 현지에서 싸게 팔 테니까 그것도 잔뜩 사 와야지! 이런 부수적인 것들이 추가되었고, 눈을 돌릴 때마다 그림이 펼쳐지는 유럽에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가서 인생샷 남겨와야지! 등이 마저 추가되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유럽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돈을 잘 모으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항상 적금은 자유 적금. 나이가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수입은 고정적이지 못해서 정기 적금은 들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달에 많게는 삼십여 만원, 적게는 오만 원씩 저축을 했고 그 와중에 다른 가까운 곳으로 여행은 계속 다녔다.
돈을 모으다 보니 시간은 금세 지나가 어느 덧 퇴사일이 되었다. 아르바이트 신분으로 2년을 꽉 채운 근무를 하고 퇴사를 하고 나니 나에겐 출국 전까지 2주의 시간이 남게 되었다. 이 시간 동안 환전도 하고, 유럽에서 쓸 체크카드도 만들었다. 물론 나중엔 이 체크카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걸로 변하고 말았지만. 그러나 이 기간엔 여행 준비뿐만 아니라 리포트 과제 3개, 졸업논문 계획서 및 논문 작성을 하고 있어서 정말 그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보냈다.
어느 정도였냐면 출국 전날까지 과제를 했는데, 정말 그때는 혼이 빠져나가는 줄만 알았다. 그렇게 과제를 끝내고 나니 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12시간. 왠지 이대로 잠들면 비행기를 못 탈 것 같은 불안함에 밤을 새우기로 결심하고 마지막까지 짐 체크를 했다. 그때 정말 더 신중하게 짐을 쌌더라면 그렇게 쓰레기처럼 들고 가지 않았을 텐데. 하긴 당시에 그걸 알았을 턱이 없으니, 어리석었던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밤을 새우다 보니 사람이 점점 미쳐가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정말 충동적으로 앞머리가 자르고 싶어 졌고, 나는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당시 앞머리는 일을 하느라 1년 동안 기른 덕에 넘길 수 있는 길이였는데, 퇴사와 동시에 싹둑 잘랐다. 그리고 3주를 넘기고 나니 길이가 애매해져서 여행 가기 전에 자르면 좋을 것 같은 크나큰 착각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일을 쳤다. 밤을 새우느라 몽롱해진 상태에서 앞머리를 아주 세게 당겼고, 싹둑 잘랐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못생김을 잔뜩 얻고 말았다. 하하.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이었다. 하하하. 자르고 거울을 보니, 오 마이갓. 혹은 맘마미아. 망했다. 이 생각만 들었다. 이를 어쩌면 좋아. 인생샷? 그게 대체 뭐지? 내가 감히 남겨올 수 있는 결과물일까?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제는 씻어야 할 시간. 울먹거리면서 씻는데, 씻는 내내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그걸 대체 왜 잘라가지고는!
씻는 내내 자책을 하고,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섰다. 비행기는 13시 35분 비행기였고, 우리 집에서 인천까지는 지하철로 꼬박 2시간 30분은 가야 한다. 대충 도착 시간을 계산하면 10시고, 그럼 가서 발권 준비에 가방 검사를 하고 뭐하다 보면 시간이 가겠지? 싶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할머니에게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공항 리무진 버스 타는 곳까지 씩씩하게 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공항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런 학기 중에도 여행 가는 사람들이 은근 많구나.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공항에 도착했다. 와, 반년 만에 오는 인천 공항이다. 올해 3월에도 후쿠오카를 가기 위해 온 곳이었는데 이번엔 유럽을 가기 위해 이 곳에 오다니.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9시 30분쯤이었는데, 체크인을 하려고 가니 카운터 오픈 시간은 10시 35분. 아-, 시간이 남는다.
일단 빈 의자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20개나 챙겨온 새콤달콤을 까먹으며 인스타에 셀카를 올렸다. 친구들과 카톡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데, 갑자기 아주머니 한 분이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네? 아, 네.”
“어머 잘됐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설문조사 한 번만 참여해줄 수 있어요?”
이런 설문조사 같은 걸 굉장히 귀찮아하는 성격인데, 체크인 시간까진 30분이나 넘게 남은 상황이어서 흔쾌히 허락했다. 설문조사 내용은 대충 인천공항 이용에 대한 거였다. 설문에 참여하면서 아주머니랑 호호 수다를 떨고 나니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이건 설문조사 응해줘서 주는 선물이에요. 큰 건 아닌데, 아주 유용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니가 나에게 준 것은 에어 목 베개였다. 사실 이게 없어서 출국 전에 친구에게 빌려왔는데, 여기서 생길 줄이야. 그래서 그냥 새로 받은 걸로 여행 내내 썼다. 설문조사 덕에 제법 시간이 빨리 갔다. 일단 셀프 체크인을 끝내고 카운터로 냅다 달려가 수하물을 넘겼다. 그러고 나니 또 할 일이 없어져서 마지막 한식으로 김밥과 제육 볶음을 시켜 먹고, 편의점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고 나니 시간이 또 남는다. 그냥 미리 들어가 있자, 싶어서 보안 검색대 줄부터 서서 기다렸다가 자동출입국 심사까지 통과하고 나니 생각보다 시간이 타이트하다. 그래서 그냥 비행기를 탔다. 동영상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때부터 까먹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동영상 인트로 부분에 대체 무슨 그림을 넣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이제껏 유럽 가기 전까지 타 본 비행기는 다 저가 항공사여서 마냥 좁았고 기내 서비스라 할 것도 없었는데, 이코노미여도 확실히 국적기는 국적기구나 라고 느꼈다. 내 좌석 앞에 영화를 볼 수 있는 화면이 있고, 저가 항공사보다 자리가 넓은 게 그저 신기했다. 사실 홍콩도 다녀온 적이 있어서 느낌은 유럽이 아니라 홍콩을 가는 기분이었다. 홍콩 가는 비행기 안에서 겨울왕국을 봤나, 빅 히어로를 봤나. 둘 다 한국어 더빙이 되어 있어서 아주 편하게 봤다.
문제는 이 다음. 홍콩 경유, 대기 시간은 7시간 45분. 아, 이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지.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홍콩도 자동출입국 등록을 해둬서 인천에서 나가듯이 편하게 나갈 수 있지만 나는 인터넷의 노예였기 때문에 아무리 한 번 다녀온 곳이라도 인터넷 없인 나갈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그냥 면세구역으로 다시 들어와 정말 무식하게 5시간을 보냈다. 음료수도 사 먹었다가 셀카도 찍었다가. 그러나 문제는 전날 밤을 새우고 갔기 때문에 졸음과의 사투가 가장 힘겨웠다. 심지어 앉아 있는데 갑자기 코피까지 터져서 당황 그 자체. 밤을 새워서 그런지 누적된 피로가 코피로 터진 듯 싶었다. 홍콩 공항에서 대기는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다. 잠은 오지, 혼자 있지. 잠들었다가 누가 내 여권 훔쳐가면 어떡하지? 이런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버티다 보니 드디어 밤 10시. 아, 얼른 비행기 타야지.
문제는 또 여기부터였다. 셀프 체크인을 한 덕에 복도에 앉았고, 담요도 덮고, 영화 볼 준비도 완료. 심지어 밤 비행기에 밤을 새워서 그런지 잠도 때마침 잘 왔다. 그렇게 곤히 잠들었다. 한참 잘 자다가 비행기가 건조해서 그런지 콧물을 자주 흘렸는데, 계속 콧물이 흐르길래 휴지를 꺼내 슥 닦아 보니까, 어라? 뭔가 거뭇거뭇하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코에서 정체 모를 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코피였다. 비행기 안에서 2차 코피가 터졌다! 으악!
기내는 깜깜하지, 승무원은 보이지 않지. 정말 사투 아닌 사투였다. 코피는 멎을 생각을 안 했고,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유럽 가기 전부터 피를 보다니. 이거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코피와 전쟁을 벌이다가 멎을 때쯤 아침 기내식이 나오더라. 아이고. 그래도 인천에서부터 런던까지 가는 동안 기내식 3번 다 챙겨 먹었다. 그건 참 잘한 것 같다.
하루를 꼬박 못 씻고, 코피까지 질질 흘려 퀭한 상태로 런던에 도착했다. 내 생에 처음으로 온 서양이었으나, 나는 이 곳에서 출입국 심사까지 끝내고 나서야 내가 비행기에 한국에서 챙겨온 모자 2개를 놓고 내렸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내 모자…
2015년 9월 21일. 런던에 도착했다. 시작부터 모자 2개를 잃어버린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