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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삼 Dec 01. 2019

모든 여행러가 행복하진 않다. 02

퇴사 후 떠난 두 번째 유럽여행, 3개월의 기록


2017년 6월 19일,
런던 day 1





2017.06.18~2017.09.15 /  88박 90일, 2일 차








  자정이 넘어가자 6월 18일에서 드디어 날짜가 하루 지나 19일이 되었다. 남들보다 더 긴 하루를, 그것도 무려 40시간 이상 보내고 있는지라 피곤함은 그 어느 날 보다 배로 느껴졌다. 내가 히드로엔 밤 11시쯤에나 떨어져서 도착 당일엔 체크인이 어려울 것 같다고 미리 숙소 사장님께 말씀을 드렸었는데, 그래도 사장님은 구태여 도착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었다. 그래서 출입국을 통과하자마자 연락을 드렸건만 사장님은 여태 답장이 없었다.


  피곤함이 두피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퍼진 것 같았다. 그냥 머릿속은 지금 내가 유럽이구나! 보다는 아, 눕고 싶다. 자고 싶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란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요텔이란 것을 발견했는데, 이미 예약은 가득 차서 방을 빌리는데 실패했다. 발견했을 때만 해도 혁신이라며 들어가면 바로 양말부터 벗어던지고 머리 감고 침대에 눕는 상상까지 했는데 말이다.


  결국 적당한 벤치를 찾아서 플리스 재킷을 꺼내 입고, 캐리어 커버를 깔고 그 위로 힘겹게 몸을 뉘었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이 것도 누운 거라고 세상 아늑함을 느낀다. 잠이 온다. 그리고 춥다. 아, 추워요. 너무 추워요...


  노숙은 사람을 너무 서럽게 만든다. 너무 추워서 발발 떨다가 결국 바람막이도 꺼내 주워 입었다. 이렇게 버티다가 새벽 다섯 시쯤 씻으러 가야겠다. 이동하고 씻고 나오면 여섯 시쯤 되지 않을까? 그럼 공항에서 간단하게 아침 먹고, 터미널로 건너가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 숙소엔 여덟 시쯤 떨어지지 않을까... 그럼 유심은 어떡하지... 아, 그러고 보니 출국할 때 내 케리어 무게가 19.6kg이었다.


  이러고 있다가 금방 잠이 들었다. 공항 벤치에서 노숙하는 상황인데 잠은 또 잘 잔다. 어딜 가도 잘 살 인간... 한 서너 시간 중간중간 깨면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새벽 다섯 시쯤 되어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샤워실로 이동했다. 히드로 공항은 두 번째고, 이전에도 한 번 샤워실을 이용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2년 전 경험은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그러나 도착한 샤워실엔 이미 누가 먼저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그가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렸다. 나 얼른 씻고 밥 먹고 싶은데, 언제 나오시나요...?


  사람이 나오자마자 얼른 짐 챙겨서 들어갔는데 2년 새에 샤워실 내부가 많이 바뀌었다. 샤워기가 있었는데, 뭔가 이상하게... 좀... 그래도 어떻게든 꿋꿋하게 씻었다. 나는 의지의 한국인. 대충 사람 모양새를 내기 위해 머리를 감고 나온 후 쓰리심도 무사히 구매 성공. 심을 산 뒤 얼른 핸드폰에 꽂고 내 사랑 코스타로 이동했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분명 2년 전에는 없던 메뉴였는데, 콜드 브루 메뉴가 생겼다. 너네, 콜드 이런 메뉴 없었잖아! 언제 이런 걸 만든 거야, 너무 고맙게! 너무 좋아! 너무 신나서 콜드 브루 블랙 한 잔과 탄산수가 아닌 물과 치즈 베이컨 토스트를 시켰는데 이 이후로도 감동의 연속이었다. 치즈 베이컨 토스트가 미친 맛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쳤다. 이 맛은 뭐지. 완전 미미. 토스트 맛에 흠뻑 취해 열심히 먹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시안 중년 여성분이 다가오셨다. 뭐지? 하고 보니 나보고 그 메뉴 이름이 뭐냐고! 내가 너무 맛있게 먹고 있었나. 기쁜 마음으로 '치즈 베이컨 토스트!'라고 외치자 웃으며 '땡큐.' 하고 주문하러 가셨다. 너무 맛있네요, 꼭 드세요.


  그렇게 또 정신없이 토스트를 흡입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분이 의자 하나만 써도 되냐고 물어보길래 '예스 예스, 암 오케이~.' 하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뜬금없이 '감사합니다!'라고 답이 돌아왔다. 아니, 물어볼 땐 영어로 물어보시고는 왜 대답은 한국어로 대답하세요. 저도 중국인인 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네~.' 하고 대답하니, 한국분이세요?라는 물음이 돌아왔다. 네. 한국인입니다. 내가 한국인처럼 안 생겨서 영어로 물어보신 거였을까. 그러더니 여행 잘 하라며 누룽지를 주고 가셨다. 세상에, 너무나 좋은 사람.


  런던에서 한국인의 따스한 정을 느끼는 사이 아무 생각 없이 남방 주머니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유럽 오면 입으려고 샀던 분홍 남방이었는데, 앞주머니에 넣어둔 볼펜이 터져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그 와중에 볼펜에 손가락도 찔렸다. 남방이 엉망진창이 됐다. 내 기분도 순식간에 잉크 범벅이 된 남방처럼 엉망진창이 됐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40분. 8시 되면 화장실 한 번 더 들렀다가 오이스터 카드를 사고 숙소로 이동한다. 일단 오전 계획을 이렇게 세웠다. 히드로 공항에만 10시간째 체류 중이었기에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오이스터 카드 구매도 무사히 성공했다. 그러나 와우, 지하철 냄새 뭐야. 뭐 이렇게 찌르르한 냄새가 다 나. 으엑. 그 와중에 또 한국에서 챙겨 온 물통이 있었는데 안을 보니까 내부가 다 썩었다. 난 씻지도 않은 물통을 챙겨 온 거야...? 정말 정신머리가 하나도 없구만. 결국 물통은 버렸다. 한 번도 못 쓰고 버리네. 그냥 스벅 엠디를 들고 올 걸 그랬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옷걸이도 안 챙겨 왔네. 난 대체 뭘 챙겨 온 걸까.


  런던 지하철은 여전했다. 여전히 인터넷은 터지지 않았다. 얘네 지하철 100년 됐다고 했던가. 이쯤 되면 슬슬 지하에서도 터지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 너무 답답해. 결국 인터넷도 안 되는 지하철 안에서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사진만 열심히 찍었다. 날씨는 정말 끝내주게 좋았다. 그리고 숙소 가면 노래 스트리밍은 구매권으로 바꿔서 다운 받아 놔야겠다. 데이터 안 터지니까 노래도 못 듣고, 너무 답답해 미치겠다.






피곤해도 셀카는 그 누구보다 세상 신나게


  현재 시간 오전 9시 20분. 환승한 줄 알았는데 반대방향을 탔다. 여전한 방향치를 자랑하며 아슬아슬하게 탔다고 생각했는데, 참나. 런던 지하철 문에 꼈다. 한국에서도 지하철 문에 목 낀 적 있었는데, 런던까지 와서 온 몸이 걸리냐. 그 덕분에 지하철 안에 있던 수많은 파란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갑자기 우주 대스타 된 기분, 하하.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다가 겨우 숙소가 있는 지하철 역에 내렸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거대한 장벽. 그렇다. 계단이었다. 20kg의 26인치 캐리어와 백팩, 에코백, 앞엔 힙색을 맨 나는 누가 봐도 유럽 여행자였는데, 이런 내가 불쌍해 보였던 걸까. 어떤 지나가던 영국 신사가 갑자기 말도 없이 내 옆으로 쓱 다가오더니 캐리어를 번쩍 들고는 계단 끝까지 척척 올라가더니 그대로 두고 눈인사만 하며 제 갈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상황이 정말 순식간에 벌어졌는데, 나는 뒤늦게 때, 땡큐! 를 외쳤다. 와우, 유아쏘 러블리.


  숙소는 지하철 역에서 내린 후로도 조금 더 걸어야 했는데, 중간에 접선(?) 장소에서 스텝분을 만나서 가야 했다. 웬 중년 남성분이 나오셨는데 숙소 사장님이신 듯했다. 만나자마자 밤에 도착하고 그래서 걱정했단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거 치고는 답장이 없으시던데요...?


  오전 10시 20분. 드디어 숙소 도착.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오~. 정말 잠만 자야 할 것 같은 곳이었다. 4인실 도미토리로 했는데 정말 2층 침대 두 개가 간신히 들어가 있고, 그 옆에 힘겹게 책상 하나가 있는 구조였다. 캐리어를 동시에 2개만 펼 수 있는 아주 협소한... 음... 닭장...?


  숙소 체크인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온 탓에 피곤해서 얼리 체크인을 했는데, 대충 짐 정리하고 나니 할 게 없어졌다. 그래, 너무 일찍 왔지. 그리고 시간도 어느새 점심 먹을 쯤이라서 사장님께 추천받은 숙소 근처 현지인 밥집에 왔다. 가게에 들어가 대충 자리에 앉으니 직원이 다가왔다. 뭘 먹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서 직원의 추천을 받기로 했다. 제일 맛있는 메뉴로 줘. 하니까 홈메이드 파이가 맛있으니 이걸 먹으란다. 그래서 오케이~. 하고 메뉴를 기다렸다.







  이게 나왔는데, 오. 오오... 짜... 너무 짜... 짜...!!! 엄청 짰다. 정말 소태 먹는 기분이 이런 건가? 입에 한 입 넣자마자 너무 짜서 으악, 외치며 콜라를 벌컥 마시는데 고기 파이도 짜고, 감자도 짜고, 심지어 콩도 짰다. 으으, 거리고 있는데 직원이 오더니 러블리를 겁나 외치고 갔다. 내가 영국 사람들 입버릇이 러블리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괴로운 나에게 피력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고 몇 분 후엔 주방장도 나와서 나한테 들리더니, 맛있냐고 물어보는데 차마 굿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낫 베드...' 했더니 혼자 '굿?! 나이스?! 흠!' 하고는 혼자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날 토닥이고는 다시 돌아갔다. 뭐야, 나 지금 농락당한 거 아냐? 아니 다 됐고, 콜라나 하나 더 주세요... 결국 콜라는 내가 알아서 셀프로 꺼내 먹었다. 도저히 콜라 없인 먹을 수 없을 정도의 소금기였다.






여행 당시 트위터에 썼던 음식 후기


  소금 덩어리 식사를 마치고 나서 깨달은 교훈이 있다면, 영국 음식은 함부로 먹지 말자. 난 이 날 이후로, 한국에 돌아온 뒤 배틀 트립 영국 편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연예인이 미트 파이 먹으면서 맛있다고 오버할 때 믿지 않았다. 나는 그 맛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식덩어리들. 졸라 짠데 안 짠 척하고 있어...


  힘겨운 식사를 끝내고 숙소 주변을 좀 걷기로 했다. 밥을 다 먹어도 오후 2시였기 때문이었다.








  푸디로 찍었더니 여기 런던이라고 아주 광고를 하네.







  그러다 들린 공원. 나는 이 곳을 이 숙소에서 지내는 2주 동안 엄청 자주 들리게 된다.








  오후 4시. 와우,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멀리까지 올 생각이 없었는데, 내셔널 갤러리까지 왔네. 숙소에 오이스터 놓고 나왔는데... 숙소는... 또 언제... 걸어서 가죠...?


  런던을 처음 왔을 때는 9월 중순이어서 그땐 약간 쌀쌀하고 추웠는데, 여름의 런던은 꽤 더웠다. 숨이 턱턱 막혔는데, 런던이 원래 이렇게 더운 도시였나...? 영국 좀 쌀쌀, 시원하지 않아...? 그리고 숙소 돌아가려면 한참 멀었는데 발바닥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망했어. 이번 여행은 첫날부터 말아먹더니 둘째 날도 망했다.








  중간에 화장실에 20펜스를 쓰고, 90펜스 물을 하나 샀는데 그 자리에서 다 마셔서 추가로 한 병을 더 샀다. 여기는 1리터짜리 물병인데도 물 입구가 쭉쭉이다. 신기하네. 사는 김에 마트 둘러보는데, 세상에 팬티라이너 10개 천 원 실화야? 왜 이렇게 싸? 납작 복숭아 5개 700원 실화야...? 테스코한테 청혼할 뻔했다.


  겨우겨우 숙소로 복귀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오자마자 싹 씻고 드러누웠더니, 세상에.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숙소에 고양이가 있었다.







  요 녀석인데 너무 귀여워... 푸스...








  청혼할 뻔 한 테스코에서 사 온 오늘의 저녁거리. 초밥이 정말 놀라운 정도로 맛대가리가 없었다.


  저녁 8시 반인 데도 밖이 훤하다. 거의 뭐 한낮 수준의 밝기에 당황했지만, 오늘 하루가 정말 그 누구보다 너무 길었기 때문에 버틸 수가 없었다. 모든 생각은 내일... 내일 하도록 하겠다. 어차피 내일은 숙소 조식이 없는 날이었다.






2017 6 19. 13,078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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