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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삼 Dec 02. 2019

모든 여행러가 행복하진 않다. 03

퇴사 후 떠난 두 번째 유럽여행, 3개월의 기록



2017년 6월 20일,
런던 day 2





2017.06.18~2017.09.15 /  88박 90일, 3일 차








  한국을 떠난 지 3일 차. 여유 있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빠트리고 나온 게 너무 많았다. 전 날 미리 준비를 해뒀어야 했는데... 거의 10시간을 기절하듯이 우주 잠을 꽂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오전 10시 41분.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날이 흐렸다.


 유럽을 덜컥 3개월을 오긴 했는데 사실 어딜 갈지, 무얼 할지 정해 놓고 온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뭘 할까 고민에 빠졌다. 일단 숙소에서 나오긴 나왔는데 나는 이제 어디 가서 무얼 해야 하는가. 일단 한국에서 챙겨 오지 않은 물건들이 많음을 깨닫고 앞으로의 여행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로 했다. 한국에 다이소가 있다면 영국엔 프라이마크가 있지. 프라이마크로 가서 슬리퍼를 사고, 가는 김에 영화 킹스맨에 나온 양복점도 가기로 했다. 찾아보니까 프라이마크랑 킹스맨 양복점이랑 근처였다. 정말 거기서, 거기. 이 말은 즉, 오늘도 나는 존나게 걸어야 하는데 왠지 힘들 것 같단 예감이 들어서 그 와중에 오이스터 카드는 챙겨 나왔다.


  숙소에서 싸고 나올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는 아침부터 화장실에 20펜스를 쓴다. 모닝 토일렛, 20p.








  세상에.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데 눈앞에 보이는 오리. 이게 무슨 일이야.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일단 프라이 마크로 가는 길은 그냥 걸어가기로 했는데, 길을 걷다 스벅을 발견했다. 어제 그렇게 찾아다녔을 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생각을 비우고 돌아다니니 찾게 되는 이 마법~! 결국 들어가서 예정에도 없던 시티 텀블러를 구매했다. 스벅 엠디 모을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일단 나는 보틀이 필요했고, 시티 텀블러 가격은 생각보다 저렴했다. 8.5파운드. 대충 만원도 안 하는 가격이라 초콜릿 60펜스와 함께 구매. 이번 유럽 여행 첫 기념품 겟.






지금도 잘 쓰고 있는 시티 텀블러


  나는 분명히 실내에서 신을 쓰레빠만 사러 프라이마크에 간 건데, 어째서 제 손엔 짐이 한 보따리가 들려 있는 걸까요? 구경만 해야지 했다가 손에는 슬리퍼를 포함한 물건이 5개가 들려 있었는데, 다행히 마지막에 정신 차려서 정말 구렸던 물건 2개는 도로 가져다 놓았다. 여행 초반부터 정신줄 놓고 지르면 거지꼴을 못 면해요. 셔츠와 바지를 샀으니, 기존에 챙겨온 이 두 가지를 버리기로 했다. 내 여행은 87일이 남았기 때문에 초반에 짐을 막 늘릴 수는 없었다.







  조금 출출해서 배 채울 겸 또 코스타에 왔다. 런던엔 코스타가 한국의 스벅만큼 있는 매장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런던 일정 내내 나는 주야장천 코스타만 갔다. 들어가서 시킨 건 당모 치베토. 치즈 베이컨 토스트요. 치즈 베이컨 토스트와 콜드브루 블랙을 주문하는데, 주문할 때 조금 귀여운 에피소드가 생겼다. 내 주문을 받던 직원은 흑인 남성이었는데 왠지 내 또래 거나 나보다 좀 더 어린 느낌이었다.


  -원 치즈 베이컨 토스트 앤 콜드 브루 플리즈.

바닐라?

-노노, 블랙. 퓨어 블랙.

라잌미?

-ㅋㅋㅋㅋㅋ 예슼ㅋㅋㅋㅋ 플리즈!


  완전 유-쾌. 라잌미? 하면서 자기 가리키고 씨익 웃는데 그렇게 쾌남일 수가 없었다. 서로 엄청 껄껄 거리면서 주문 하고, 토스트와 음료를 받아왔다. 귀여운 친구였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코스타에서는 뭐 별거하지도 않았는데 한 시간이나 보냈다. 근데 정말... 너무... 일어나기 싫은 걸요...? 밖이 너무 더워요...













  이번 여행의 테마가 있다면, 다른 나라나 도시는 모르겠지만 런던만큼은 공원이 보이면 죄다 부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일명 런던 공원 투어. 나름 이땐 공원들 다 들어가 보고 드러눕기도 하고, 리뷰를 상세하게 남길 생각이었는데 지금 이 일기를 적는 것도 2년이 지나서야 쓰고 있잖아...? 절대 완성 못할 콘텐츠... 아무튼 이때 당시 계획은 그랬다. 그래서 옷걸이와 슬리퍼는 안 챙겨 왔지만 2천 원 주고 산 돗자리는 챙겨 왔고, 오늘 외출에도 챙겨 나왔다. 정말 모자란 듯 완벽한 사람이야, 나는.


  돗자리를 챙겨 왔기 때문에 얼굴에 철판을 깔고 눕기로 했다. 돗자리를 펼친 후 짐을 늘어놓고 그 위에 앉았다. 세상에. 앉으니 너무 좋아. 난 여기서 한 시간은 즐기다 갈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말 돗자리 위로 드러누웠다. 누우니까 잠이 와. 너무 좋아.






여행 내내 이딴 식으로 사진 찍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공원 오기 전에 영국 박물관을 갔었는데, 안 적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있길래 갔다. 딱히 꼭 가야지! 하고 계획했던 곳은 아니어서 설렁설렁 산책하듯이 들렀다. 어차피 영국은 공짜니까! 지들 건 거의 없고 다 약탈해 온 유물들인데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스틸 기술이 정말 대단했다. 신전을 통째로 뺏어오다니. 이 악랄한 영국 놈들 같으니라고. 어쨌든 덕분에 화장실도 잘 썼고, 기념품은 너무 비싸네요. 입장료가 공짜라고 기념품으로 채우는 놈들. 그 기념품마저도 지들 건 거의 없으면서. 그러니까 대머리 유전자가 많은 거예요.






지나가다 역시 해리포터의 나라!하면서 찍어 본 건물








  걷다가 테스코 발견.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코스타에서 먹은 치즈 베이컨 토스트와 콜드 브루 한 잔뿐이었기 때문에 슬슬 출출해진 차였다. 테스코라 쓰여 있었지만 편의점 같은(왠지 우리네 롯데슈퍼 같은 느낌.) 느낌의 가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산 1파운드짜리 치즈 어니언 샌드위치. 1,300원짜리 편의점 샌드위치랑 비슷한 퀄리티일 텐데 세상 존맛이었다. 같이 산 펩시는 99펜스. 이야, 인간은 왜 이렇게 끝자리 99를 좋아하는 거야. 만국 공통 마케팅 전략일세. 총 1.99파운드. 3천 원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배가 왠지 꾸륵꾸륵한 것이 숙소를 가면 지사제를 먹어야 할 것 같다.







  난 어제부터 공원만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특히 빅토리아 가든은 숙소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보이면 꼭 들어가 앉게 됐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 숙소에서 나올 때도 그랬고, 돌아가는 지금도 그렇고. 그렇지만 너무 좋은 걸 어떡해요. 여긴 화장실도 있는 걸요(유료지만.).


  오후 5시 44분. 결국 킹스맨은 가지 못했다. 프라이마크에서 온 힘을 다 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시간 많잖아. 앞으로 런던에 18일이나 더 있는 걸. 그리고 힘들어 뒈질 거 같으니까 쉬엄쉬엄 다닐 필요가 있었다. 현재 모든 사진이 다 아이폰인데, 정말 너무 심각하게 카메라 가지고 나오는 게 귀찮았다. 난 이번 장기 여행에 정말 생각보다 엄청 많은 걸 가지고 왔는데(슬리퍼랑 옷걸이는 안 가지고 왔지만), 그중 신경 쓰이고 무거웠던 것들 두 개를 꼽으라면 바로 노트북과 dslr 카메라였다. 근데 가지고 오면 뭐하냐고요. 카메라 무거워서 못 들고 다니겠어요...


  일단 숙소 가면 메모리카드부터 정리를 해야겠다. 내일은 세븐 시스터즈를 가기로 한 날이라 카메라를 들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런던 시내 돌아다닐 때는 몰라도 시외를 가면 그래도 들고 가야 하지 않을까...?


  숙소 돌아갈 때 복숭아랑 샐러드랑 주스를 사들고 가기로 했다. 세인즈버리에 제발 복숭아가 있으면 좋겠다. 테스코까지 가기는 내 몸뚱이가 이제 한계였다. 오후 6시가 되었지만 여전히 훤한 대낮 같았다. 그러나 계속 그늘에 앉아 있었더니 몸에 한기가 돌아서 이제 그만 일어나기로 했다. 아, 근데 가기 전에 화장실부터. 20펜스의 행복은 바로 화장실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유럽 와서 화장실에 돈 아끼지 말자. 용변 해소만큼 확실한 소확행은 없다.


  세인즈버리에 왔다. 지금 사는 복숭아랑 샐러드, 주스는 사실 내일 세븐 시스터즈 가서 먹을 점심이었다. 그러다 계산하는 중간에 쿠폰 넣는 구멍인데 거기에 동전을 넣어서 돈을 날리게 되는 소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아, 세상에. 멍청하면 죽어야지, 진짜. 동전이지만 한국돈으로 치면 2천 원이 넘는 돈인데요.. 저 돈이면 복숭아가 몇 개냐고...!


  그렇게 멍청하게 동전을 날리고 나서 돌아온 숙소엔 새로 룸메이트가 와 있었다. 굉장히 붙임성이 좋고 밝고 명랑한 친구였다. 이 친구도 내일 세븐 시스터즈 가는 거 신청했다면서 같이 가서 사진도 찍어주고 놀자는데 그 밝은 에너지에 나도 덩달아 갑자기 조금 신이 났다. 와, 세븐 시스터즈 사진 못 건질 줄 알았는데 사진 동행 생기면 사진 찍겠네!


  밤 10시. 드디어 바깥이 깜깜해졌다. 유럽의 여름은 낮이 엄청 길구나, 를 3일째 새삼 신기해하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동네야, 여긴.


  오늘도 더위 속에서 많이 걸은 지라 두 다리에 피곤이 잔뜩 몰렸다. 한국에서 챙겨 온 휴족시간을 꺼내 종아리, 발목, 발바닥에 붙이니 그렇게 화끈할 수가 없다. 온몸이 불타 오른다, 불타 올라. 샤워 후 휴족시간까지 붙이고 침대에 누우니 온 몸이 노곤해졌다. 눈이 슬슬 감기는 꼬라지를 보니 드라마 보는 건 틀렸고, 유튜브나 대충 몇 개 보다가.. 사진 정리도... 그냥 내일 하자... 오늘은 일단... 그러자...


  그러나 숙소 와이파이가 엄청 후진 덕에 결국 유튜브 플레이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2017년 6월 20일. 19, 818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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