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글방 수업일지 04.
10주 짜리 수업 커리큘럼을 정해놓고 시작한 글방이지만 4주 만에 개편의 필요성을 느꼈다. 글쓰기 교사들의 교육 지침서에 박제되어 있는 어린이를 상정해두고 구성한 수업 커리큘럼이 실제 생동하는 어린이들과 만났을 때, 학년과 나이로는 어린이들을 결코 기성화 할 수 없다는 몸의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주는 화창한 날씨가 줄곧 이어져 나로서도 쉬이 보내기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수업을 이틀 앞두고 기존 커리큘럼을 엎고 야외 수업에 좋은 활동으로 바꾸었다.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시를 쓰는 계획이었다. 헌데 세 친구 중 한 명이 병원 진료로 결석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하루 전 날 들었다. 아쉬운 마음은 내 쪽에서 더 컸다. 결석 예정인 친구는 지난 주 처음 글방에 온 어린이였는데,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도 글을 쓸 때면 또박또박 신중한 글씨로 소중한 기억을 꺼내주던 친구였다. 그 어린이가 큰 기대없이 온 글방에서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자기가 본 것, 느낀 것이 글이 되는 경험을 할 때 그 인생에 어떤 지진이 일어날까, 기대가 되어서였다. 수업을 두 번 엎는 번거로움은 내 쪽에서만 감수하면 될 일이다. 나는 아쉬움 대신 수고로움을 택했고, 야외 수업을 다음주로 소중히 간직한 채 새로운 수업을 다시 준비했다.
중학생 이후 실로 오랜만에 문방구에 갔다. 그림책 <단어 수집가>에서 낱말 카드를 수집하는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낱말이 적힌 카드가 하늘에서 뿌려질 때 단숨에 툭 떨어지지 않고 어느정도 공중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두어 카드를 잡기까지 조마조마해지는 마음을 어린이들이 갖기 바랐다. 그런 무게감을 가진 지류로 한지나 기름종이를 생각했으나 그건 너무 나부낄 것 같아서 색도 알록달록 보는 재미가 있고 적당히 얇은 색종이가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발길을 끊었던 문방구에 들어서는 순간 풍기는 당연하고 익숙한 냄새에 코를 덮고 있는 마스크가 조금은 헐거워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카운터를 빙 두르다 못해 공중에 매달아 놓기까지 한 문방구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봐주지 못하고 나와야하는 촉박한 일정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문방구나 철물점, 이불집의 공통점은 '이 많은 물건들이 언젠가 다 팔리긴 하는걸까'라는 오지랖 넓은 걱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탐구할 가치가 있는 재미난 보물 창고라는 점이다. 절대적인 어린이들의 수가 적어지기도 했고, 대형 마트나 온라인에서도 문구와 학업용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예전에 비해 많은 문방구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교길에 친구들과 엄마 몰래 사먹는 불량 식품과 사놓고 쓸 일도 거의 없는 조잡한 문구를 수집하는 재미가 요즘 어린이들에게도 따듯한 추억이 될터인데 그 재미를 양껏 누리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내 눈에는 아쉽게 보인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문방구에서 나와 오늘의 수업 자료 대여하고, 수집이라는 주제를 쉽게 소개하기 위한 '포켓몬빵'도 운 좋게 구했다. 심지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들뜬 아이들의 반응과 높아지는 집중력에 오늘의 운은 충분히 다 쓴 것 같다고까지 생각했다. 퍽퍽하긴해도 있을 때 먹어두어야 할 것 같은 포켓몬빵에 미각을 집중시키면서 어린이들의 눈은 그림책을 따라왔다. 일상 속에서 여러가지 단어를 수집하는 주인공 제롬의 낱말 파일이 뒤죽박죽 되면서 연관성 없는 단어들이 무작위로 나열되는 장면이 있다. 빨랫줄에 널어진 무의미한 단어들을 보며 10살 구름이(필명)는 알아서 하나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만들어 들려주었다. 모든 재료를 놀잇감으로 여겨 결과물의 완성도에 상관없이 갖고 놀고 싶어하는 게 어린이들의 창의력 같다.
수많은 낱말 카드를 높은 절벽 위에서 한꺼번에 흩뿌리며 온 세상 어린이들과 나누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하이라이트 부분을 동화책을 덮은 후 어린이들과 재현했다. 갑자기 의자 위로 올라가는 선생님의 모습에 상황 파악을 하는 듯 멍해 보이던 어린이들이 자기 키보다 높은 곳에서 낱말 카드가 뿌려지기 시작하니 앞다투어 줍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두 어린이 모두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자세를 취하고 경쟁적으로 단어를 수집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단어인지 먼저 확인하는 건 사치였다. '종이가 공중에서 체류하는 동안 어떤 단어일지 기대하는 조마조마하는 마음'은 나만의 낭만으로 끝나버렸지만 어린이들이 보여준 역동적이고 자발적인 모습이 훨씬 생명력 있게 느껴졌다.
오늘 내가 계획한 수업은 각자 수집한 낱말 카드를 쭉 살펴보며 모르는 단어를 학습한 후, 몇 단어로 N행시를 쓰거나, 한 단어를 선택해 떠오르는 글을 쓰는 것으로 진행되어야했다. 헌데 어린이들이 이미 다른 곳에서 이런 경험을 했던걸까? 자신들이 그러모은 단어카드를 좁은 책상에 다닥다닥 펼쳐놓고 재빨리 확인하더니 이미 머릿 속에서 구상을 끝낸 노련한 작가처럼 제목을 정하고 글을 써내려갔다.
10살 구름이는 글방으로 오는 길에 쓸 글을 정하고 왔다고 했다. 처음에 '미워!'라는 제목으로 2줄을 넘긴 글을 쓰던 도중 8살 크리퍼(필명)가 수집한 '파파야' 카드를 발견하곤 자신에게 달라는 제안을 했다. 크리퍼는 구름이의 카드 모음을 유심히 보더니 '국수' 카드와 바꾸자는 딜을 제시했고, 둘은 만족스럽게 맞교환을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글을 진행하던 구름이가 이번엔 크리퍼에게 '아이스크림' 카드를 달라고 했다. 애당초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구름이를 겨냥하여 넣은 단어였다. 과연 크리퍼가 이번에는 어떤 카드와 바꾸자고 할까, 어쩌면 싫다고 할지도 모르겠어, 듣는 쪽에서 더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리던 사이에 크리퍼는, "그냥 누나 가져" 라고 답했다.
크리퍼는 자신이 모은 여러 장의 카드 중에 마음에 드는 다섯 가지 낱말만 추려낸 상태였다. 사실 그 외의 카드는 '소유' 외에는 부가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우리는 그저 '가지고 있다'는 행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가. 필요성을 곱씹어 따지기 전에 다다익선을 갖다붙인 가치관에 휩쓸려 오히려 훌룽훌렁 살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건 아닌가. 어른의 세상에서 살던 나는 어린이들의 말과 글, 행동이 주는 낯섦이 좋아 이 글방을 점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오로지 자기 기준에 근거해 추려낸 크리퍼의 낱말 카드 다섯 가지, 트리케라톱스, 국수, 상어, 마인크래프트, 과카몰레를 모두 넣어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크리퍼 자신이 꼽은 단어에 책임지기위해 마인크래프트 등장 캐릭터들이 가상의 국수 게임을 창조했고, 그 게임 방식을 설명하는 대화문으로 글은 이루어져있다. 국수에 과카몰레를 넣어 먹기도하고, 중간에 트리케라톱스와 상어를 만나기도 하지만 무사히 대피해 안도하는, 실제 게임과 달리 살아 있는 어린이만의 이야기다.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어린이들의 솜씨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목표하는 나에게 귀감이 되는 본성이다. 오늘 결석한 어린이를 위한답시고 바꾼 수업에서 내가 더 감격하고 배워 간 날인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