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의 바다에 노을이 붉다
강화를 말할 때 우리 땅의 유구하고 아린 역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강화는 한민족의 긍지와 회한이 함께 묻혀있는 섬이다. 멀리 5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단군이 제단을 쌓고 천제를 지내던 참성단이 이곳에 있으며, 곳곳에 자리한 고인들 유적들은 선사시대의 오랜 인적을 증명한다. 그런가하면 강화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던 저항의 섬이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에 맞서 39년간 처절한 장기전을 치루던 곳이며, 그때 팔만대장경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인조에 이르러서는 후금에 의한 정묘호란이 발생하였고, 또다시 조정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어진 병자호란 때는 최후의 저항지였던 이곳마저 함락되어 치욕의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프랑스 함대의 병인양요, 미국 함대의 신미양요, 일본의 운요호 사건 등 열강들의 조선침략 발판을 위한 격전지가 되었다. 말 그대로 강화도의 역사는 한국사의 축소판이며, 섬 곳곳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은 모두가 격전과 저항의 처연한 흔적들이다. 유난히 붉은 강화의 노을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로 부터 기인한 것은 아닐까 싶다. 한편 섬 남쪽의 동막리, 여차리 해안은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잘 보존된 갯벌로 알려져 있다. 느즈막한 노을풍광은 섬의 서쪽 어디서든 아름답기 그지없다. 주변의 석모도와 더불어 서울근교의 손꼽히는 낭만주의 여행지로도 각광받고 있지만, 이곳을 찾게 되면 누구든 숙연한 마음 한자락 지녀볼 일이다.
염하(鹽河).. 김포와 강화 사이를 흐르는 지류다. 강화해협으로도 불린다. 염하를 따라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 황해도 개풍군의 모습이 보인다. 닿을 수 없는 땅은 저렇게 지척에 있는데, 닿아야할 시간들은 가늠할 수 없다. 노을이 유난히 붉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39년 간의 몽고항쟁이 이루어진 곳이다. 고려궁터는 몽고를 막아내기 위해 고려왕조가 송도에서 도읍을 옮겨와 세운 궁궐이다.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규모는 작지만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졌고 궁궐의 뒷산이름도 송악이다 불렀다고 한다. 조선 인조 때에는 이곳에 외규장각이 설치되었는데 병인양요때 프랑스 군에 의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고려궁터에는 현재 외규장각이 복원되었으며 조선시대 관아건물인 유수부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강화산성은 원래 내성과 중성, 외성 등 삼중성으로 쌓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내성 뿐이고, 성의 둘레는 약 1.2km 정도다. 1259년 몽고가 화친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이 강화산성을 허무는 것이었다고 하니 성의 견고함을 알만도 하다. 조선초기에 재축조 되었다가 병자호란때 다시 파괴 되었다. 강화산성은 사적 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화와 김포 사이의 해협은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해협을 지나면 곧바로 한강을 거슬러 중심에 닿을 수 있었다.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고려시대부터 수비대가 상주했고, 조선 효종때에 이르러 본격적인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한 조정은 강화와 김포의 해안 곳곳에 진과 보를 두고 여기에 소속되는 돈대와 포대를 구축했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 사이에 진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갑곶돈대는 1232년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고와의 항쟁을 이어가던 중요한 요새였다.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몽고군을 비롯한 침략군들에게는 꼭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이다. 강화해협의 진지들은 근대 격변기에 접어들며 주요 격전의 장이 되었다. 운요오호 사건이 이곳에서 있었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특히 신미양요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조선 군사들이 전멸할 정도로 처절했는데 초지진의 성벽과 나무에는 당시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강화에는 5개의 진과 7개의 보, 53개의 돈과 8개의 포대, 8곳의 봉수대 등이 있었으며, 현재는 광성보, 초지진, 덕진진과 소속 돈대와 포대가 남겨져 있다.
마니산(468m)의 원래 이름은 마리산이다. 마리란 머리의 옛 말로 강화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땅, 즉 제일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 산의 꼭대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사적 136호)이 자리하고 있다. 참성단은 지름 4.5m의 둥그런 원형기단 위에 사방 2m의 네모난 제단이다. 참성단 제사는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졌으며 지금도 개천절에 단군을 위한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성단의 존재는 먼 고조선 시대로부터 강화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곳의 오랜 역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또 하나의 유적은 강화도 전역에 분포된 고인돌이다. 모두 80여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하점면 부근리의 강화지석묘와 오상리, 삼거리 고인돌군이 볼만하다.
한편 마니산,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의 세 꼭지점으로 불리우는 고려산(436m)은 봄철 진달래 산행과 가을철 억새 산행지로도 유명하다. 낙조봉 정상부에 펼쳐진 드넓은 억새군락과 장엄한 일몰풍광으로 강화 제8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고구려 장수왕때 창건한 적석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고구려 장수인 연개소문이 태어났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전등사는 온수리 정족산 기슭 삼랑성 안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25대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이 옥으로 만든 등을 하사했다 해서 전등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군량미를 보관하던 군창터가 남아있는 것을 보아 전시에는 기지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대웅전 추녀 밑에 벌거벗은 나신상이 쪼그리고 앉아 처마를 떠받들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전설이다.
광해군 6년에 전등사에 불이나서 다시 짓게 되었는데 공사를 하던 목수가 아랫마을 주막집 주모를 사랑하게 되었단다. 목수는 날마다 일해 받은 품삯을 그 주모에게 맡겨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돈을 갖고 먼 곳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목수는 화가 나서 법당 네 귀퉁이에 벌거벗은채 처마를 떠받드는 여자 모습을 조각해 놓았고 부처의 좋은 말씀을 듣고 여인이 뉘우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전등사에 비해 작은 사찰인 정수사는 마니산 자락 동쪽 산허리에 숨겨져있다.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한 후 세웠다. 대웅전 건물이 보물 161호로 지정되어있으며 꽃무늬가 새겨진 문창살이 특히 아름답다.
강화대교를 건너면 바로 강화읍내다. 읍내초입의 오른편에 강화풍물시장이 있다. 강화에 장이 서게 된 것은 그 유래가 깊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침입하자 위기를 느낀 고려정부는 강화도에 궁을 지어 천도했다. 대륙에 자리한 몽고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섬의 지형을 이용해 저항해보려는 의도였다. 고려의 강화 천도시절은 무려 39년간 지속된다. 이때 강화의 장터가 활성화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에는 외국무역의 주요품목이었던 직물과 화문석, 도자기 등이 주로 거래되었고, 상거래가 활성화되자 보부상들이 드나들며 본격적인 장이 형성된 것이다. 현재의 강화풍물시장은 1993년, 동락천이 복개되면서 만들어졌다. 300여개의 상점이 입점해있으며, 2일과 7일에는 오일장이 열린다. 바다를 끼고 있는 지형과 풍부한 산지, 수도권의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강화시장의 물품들은 풍성하다. 각종 약초와 생선, 젓갈류를 비롯해 강화의 특산물인 강화순무와 강화인삼, 화문석 등이 거래되고 있다. 관광자원이 풍부한데다 서울과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특히 제철 해산물을 맛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강화와 김포사이의 염하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최적의 조건이어서 다양한 해산물이 많이 잡혀온다. 이즈음엔 보리숭어가 제철이다. 강화의 젓갈도 유명하다. 강화의 젓갈은 주로 서쪽 끝에 자리한 외포리에서 만들어지는데, 김장철에는 젓갈을 사려는 주부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강화에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육이오전쟁 이후부터다. 남쪽으로 피난온 개성사람들이 이곳에 인삼밭을 가꾸기 시작했는데 강화의 토양이 인삼이 자라기 적합한 습도와 토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특히 홍삼의 재료가 되는 육년근 삼이 자라기 좋은 조건이라고 한다. 한때는 강화의 인삼 값이 전국의 인삼 값을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강화 화문석이 유명하게 된 것은 역시 이 지방에서 나는 질 좋은 왕골 덕분이다. 화문석의 재료가 되는 왕골은 땅이 습하고 날씨가 따스해야 하는데 강화의 기후와 토질이 여기에 적합했던 모양이다. 인삼과 더불어 강화 화문석은 전국의 뭉칫돈을 끌어들이는 큰 수입원이 되어왔다. 그러나 화문석은 그 쓰임이 줄면서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다.
강화도 서쪽으로 약 1,5km 건너에 자리한 석모도는 원래 불자들이 많이 찾는 섬이다. 이 섬에는 낙산사 홍련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 관음도량으로 알려진 보문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기도효험이 좋다고 한다.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세워진 사찰로 전등사, 정수사와 더불어 강화도의 3대 사찰이다. 이 불자들의 섬이 언제부터인가 낭만주의 여행자들에게도 특별한 섬이 되었다. 외포리에서 배를 타면 10분 정도 밖에 안걸리지만 섬과 섬사이의 뱃길 여행이 운치있고 석모도 자체의 길과 마을이 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특히 안개가 끼는 봄, 가을의 아침나절이 특히 매력적이고 보문사와 민머루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황홀하다. 근래들어서는 펜션이 많이 들어서 하루 묵어가는 여행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 고인돌 유적이 있는 하점면에 강화역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먼저 이곳에 들러 강화도의 역사와 자연에 관한 개략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돌아본다면 더욱 유익한 여행이 될 것이다.
- 강화도의 해안과 내륙, 석모도, 불음도, 주문도 등 인근의 섬까지 구간별로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나들길이 있다. 모두 19개의 코스가 있으며, 강화의 자연과 역사를 조금 더 가깝게 둘러볼 수 있다.
- 4월, 강화 고려산 능선자락에는 진달래가 만개한다. 바다를 배경으로 붉게 물드는 산자락이 장관을 이루는데, 진달래가 필무렵 이곳에서는 축제가 열린다. 축제기간에는 꽃만큼 사람 또한 인산인해를 이루니 앞 뒤로 하루이틀 살짝 비켜서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이른 아침이나 저물녘 풍광이면 더 좋겠다.
+ 강화나들길 안내 http://www.nadeulgil.org/
+ 강화역사박물관 http://www.ganghwa.go.kr/open_content/museum_history/
+ 강화자연사박물관 http://museum.ganghwa.go.kr/
+ 고려산 진달래축제 및 강화축제 정보
http://www.ganghwa.go.kr/open_content/festival/sub/azalea.jsp
+ 2017년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석모대교의 개통으로 이제는 차를 이용해 석모도까지 직접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도 추천한다. 갈매기와 새우깡이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에게 또하나의 추억거리가 된다.
+ 외포 선착장/ 032-932-6007
+ 석포 선착장/ 032-932-3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