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헴의 문화유산답사
연못 주변의 버드나무 숲길이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풀냄새, 물냄새, 흙냄새,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냄새..
500여 미터의 연못 둘레는 알 수 없는 적막과 향취가 가득하다.
궁남지. 이곳은 왕가의 정원.
패도의 한이 서린, 그래서 본디의 모습보다는 초라해졌겠으나
고즈넉한 궁남지를 거닐다보면 어디선가
왕가의 자분자분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신라에 의해 패망당한 이래 백제는 늘 미약하고 사소한 존재로 전락하여 끝내 '잃어버린 왕국'이 되고 말았다. 부여는 백제의 멸망을 맞이한 마지막 수도이다. 전승국의 수도 경주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잘 가꾸어지고 보존되어 왔다면 패도 부여는 철저하게 압살되어 왔다. 기록에 의하면 번성했을 당시 사비(부여의 옛 이름)의 가구수가 13만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림잡아 100만에 가까운 수치인데, 지금의 인구가 겨우 3만여명 남짓하니 패전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이 곳을 떠났는지 알수있음이다. 성은 허물어지고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궁터와 많은 유적들이 아픈 한을 간직한채 그 흔적을 세월 속으로 묻어갔다. 그저 작고 나직한 건물들, 도시는 남루하고 을씨년스러워보인다. 그러나, 부여의 거리를 거닐다보면 삼국시대 당당한 축을 이루었던 고대국가 백제의 모습을 종종 찾아볼수 있다.
부여는 538년부터 660년까지 123년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수로를 따라 백제를 공격해왔고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 역시 육로를 통해 이곳 사비성으로 진격해오게된다. 당시 백제의 장군이었던 계백은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인다. 계백은 전장에 나가기 앞서 나라의 운명이 마지막에 다다랐음을 깨닫는다. 그는 "내 가족들이 적에게 잡혀서 노비가 되는 치욕을 겪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겠다." 하고 스스로 가족들의 목을 베고는 황산벌로 달려갔다. 계백의 이같은 결심에 감명받은 5천명의 결사대는 그야말로 죽기를 다하여 싸웠고 이 기세에 열배가 넘는 수의 신라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라에는 화랑 관창이 있었다. 관창은 계백이 생포했다가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적진으로 달려와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는데 이를 본 신라군 역시 크게 감격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결국 백제군을 무찌르게 된다. 이 싸움에서 계백과 5000명의 결사대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장렬히 전사하게된다. 황산벌이 무너지고 사비성은 변변히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백제의 멸망에는 당나라 소정방에 얽힌 또하나의 전설이 전해져온다. 부소산성 밑 유람선 선착장에서 보면 백마강 상류쪽에 바위섬 하나가 보이는데 이것은 조룡대로서 용을 낚은 바위라는 뜻이다. 백제를 치러 온 당나라 군대가 백마강을 건너 사비성으로 들어오려는데 계속해서 안개가 끼었다고 한다. 날이 맑았다가도 강을 건너려면 갑자기 안개가 자욱히 밀려오곤했는데 이 때문에 도저히 강을 건널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장수였던 소정방이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 그 까닭을 물으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의자왕이 밤마다 용이 되어 백마강을 지키려고 안개를 피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소정방은 바로 그 바위 위에 올라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낚시를 드리우고 결국 용을 낚았다고 한다. 그러자 안개는 말끔히 걷히고 당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 사비성으로 들어올수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서기660년 7월, 백제는 시조로부터 31명의 왕, 678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성이 무너지자 당시 사비성의 궁녀들은 낙화암으로 달려갔다. 당나라 군사들에게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백마강에 몸을 던져 깨끗하게 죽겠다는 생각이었다. 궁녀들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낙화암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 수가 삼천명에 다다랐다고 하니 얼마나 애절한 광경이었을까? 삼천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유래로 이 곳 바위에 낙화암(洛花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600년의 역사를 지닌 백제, 123년 동안 수도였던 부여. 승전국의 수도 경주에 비한다면 이곳에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은 볼품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볼품이 없다는 것은 오로지 숫적 비교에 한정된 말이다. 백제는 신라를 능가하는 문화의 왕국이었다. 신라보다 143년 앞서 불교가 공인되었고, 중국과 일본을 통한 국제교류 역시 더욱 빈번하였다. 외국의 문물과 백제인 특유의 장인정신이 결합하여 백제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으니, 패도의 아픔이 한반도 역사의 아픔이기도 한 이유이다.
부여의 중앙에 자리한 중요한 유물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있다. 패망 후 1300여년 동안 오롯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정림사지의 오층석탑 뿐인데, 그 지형성과 역사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탑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의미가 큰 유물이다. 미륵사지 서석탑이 무너져내린 이래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를 대표하는 명실공히 국가대표급 탑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아니라 이후 세대의 수많은 백제탑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어졌을 정도로 미학적인 완벽성을 지닌 탑이다.
어느 도시를 가든 그곳에 박물관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필수 여행지로 손꼽는다. 박물관은 그 도시 혹은, 나라의 역사와 삶과 문화가 함축되어있는 인문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예술은 우아함과 섬세함, 정교함이 특징이다. 부여 금성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 부여박물관에서는 그러한 백제문화의 멋을 만나볼 수 있다. 백제 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백제금동대향로, 화려한 문양이 인상적인 산경문전과 전돌, 기와문양, 수수한 백제 토기들을 살펴보면 백제의 문화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웠는지를 알 수 있다. 선사시대와 고대의 유물들도 잘 정리되어있다. 주로 부여 주변의 송국리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적과 철기, 구석기 유물들이다.
나의 부여 여정의 끝은 대부분 임천면의 성흥산성에 올라 노을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동성왕 23년(501년) 축조된 성흥산성은 268m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 위에 만들어졌으나, 성 위에 오르면 강경과 논산, 멀리 군산과 익산, 서천의 산하가 막힘없이 펼쳐보여 이곳이 오래 전부터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성흥산성에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이야깃 거리가 전해져오고 있다. 성을 축조한 동성왕은 위사좌평 백가에게 성을 관리하고 지킬 것을 명하였는데, 중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가는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했다. 백가의 반란은 무령왕이 즉위하자 바로 진압되었고 백가는 참형되어 백마강에 버려졌다. 백제가 패망한 후 무왕의 조카였던 복신과 승려 도침이 백제 부흥운동을 펼쳤는데, 그 근거지가 바로 성흥산성이었다. 3년의 항전 끝에 백제부흥운동은 이루지 못하고 결국 괴멸되었다. 성문 초입에 거대한 느티나무 한그루가 지는 노을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데, 흡사 핏빛과도 같이 붉고 사위는 저녁바람 소리가 애닯다.
개략적인 답사일정
궁남지 - 정림사지 - 국립부여박물관 - 부소산성 - 고란사와 구드레나루 - 능산리고분 - 대조사 - 성흥산성
Point
- 궁남지는 고즈넉한 새벽에 보는 것이 좋다. 봄과 가을 일교차가 클때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좋고, 버드나무에 새순이 돋는 사오월 새벽도 좋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당나라 소정방이 새겨놓은 글귀가 있다. "大唐平濟國碑銘" 백제를 평정한뒤 기념하여 새긴 것이다.
- 장하리에 있는 장하리 삼층석탑(보물184호)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본따서 만든 고려시대의 백제계탑을 대표한다.
- 성흥산성 바로 아래 자리한 대조사에는 독특한 양식의 미륵보살입상(보물217호) 이 있다. 성흥산성 오르기 전에 올라볼 것.
- 부소산 백마강가 고란사에서 구드레나루까지 유람선이 운행된다. 20명 이상이면 황포돛배를 이용할 수 있다.
구드레 나루터(041-835-4689), 고란사 나루터(041-835-4690)
- 2010년 만들어진 백제문화단지도 볼만하다. 사비시대의 궁궐을 재현해놓았다.
- 구드레 나루의 장원막국수, 부소산성 주차장 건너 벡제의 집 쌈밥이 먹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