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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정우 Jan 26. 2016

백제역사유적지구 - 익산

보헴의 문화유산 답사

 



 호남고속도로 익산분기점을 지나 전주방향으로 달리다보면,  고속도로 방음벽 너머로 빼꼼히 머리를 내민 석탑 이 있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나는 안부를 묻듯, 차 창을 내리고 석탑을 찾곤 했다. 단지, 보여서가 아니다. 오래 전 이 탑을 처음 마주했을 때 이미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8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완벽한 비례감, 천년 세월의 질감이 얹혀진 이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더불어 백제계 석탑을 대표하는 왕궁리 오층석탑이다.



   '백제 탑의 쌍두마차, 왕궁리 오층석탑'


왕궁리 오층석탑(국보289호)


 동북쪽으로 논산 강경평야, 서쪽으로 군산 임옥평야, 남쪽으로 김제 김만평야가 익산 땅을 에워싸고 있고, 이 평지들을 잇는 익산 또한 너르고 평평하다. 너른 땅을 금강과 만경강이 흘러와 적시니 땅은 비옥하고, 이런 연유로 오래 전부터 이곳은 농경문화가 번창했다. 익산은 삼한시대를 지나며 인근 정치문화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익산의 전성기를 논하자면, 무왕시절이 아닐까 싶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남쪽 못 마룡지의 용과 통정하여 무왕을 낳았다. 아이는 몹시 총명하고 영특하여 훗날 백제의 30대 왕이 되었다. 무왕은 왕이 되자 익산 땅에 왕궁과 정원, 큰 사찰을 짓고, 성을 쌓았다. 혹자는 무왕이 이곳으로 천도하려 했다고도 하고, 혹자는 수도 사비와는 별도로 제2의 도시를 만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백제의 패망으로 인해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왕궁리 유적은 평평한 구릉 위에 자리한 남북 492m, 동서 234m의 궁성유적이다. 경사면으로 따라 4단의 석축을 쌓고, 대지를 조성하여 궁궐과 후원을 배치했다. 오랜 시간 왕궁리 오층석탑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으나 근래 몇 년 동안의 발굴과정을 거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왕궁리에서 발굴된 기와와 수막새. 기와에는 관궁사, 궁사, 상부대관 등의 명문이 적혀있다.

  

 왕궁리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000여 점으로 유리, 금제품, 기와, 수막새, 도가니 등이다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강경과 사리장엄구는 국보 123호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동고도리 석불(보물46호)


 한편, 왕궁리 유적에서 800m 쯤 떨어진 들판 위에 두 기의 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동고도리 석불이다. 하나는 남자석불, 하나는 여자석불인데,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200m 가량 떨어져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평소에는 이렇게 떨어져 있다가 섣달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볼때마다 웃기기도 하고, 갸웃거리게 하는 것은.. 저 눈의 멍자국들은? 도대체 왜???



"신라는 황룡사지, 백제는 미륵사지" 


미륵사지 (사적150호)

 

 왕궁리에서 금마면 소재지를 지나 722번 지방도 함열 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삼각형 모양의 오똑 솟은 산자락이 눈에 띈다. 이곳 금마면의 진산인 미륵산이다. 용화산이라고도 불렸다. 미륵산 남쪽 자락 아래에 미륵사지가 있다. 경주 황룡사가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다면, 미륵사는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백제 무왕 때 창건되었고, 고려시대까지도 번성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사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륵사지는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 전체면적 십만여 평의 거대한 절터다. 대체적으로 백제의 사찰들이 전각 하나에 탑 하나를 배열하는 일금당 일탑 방식인데 비해 미륵사는 삼금당 삼탑 방식이다. 중앙에는 본당과 목탑, 좌우로 각각의 법당과 동석탑, 서석탑이 자리했다. 이것은 미륵사의 창건설화에서 유래된 듯싶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미륵사 청건설화가 기록되어있다. 


 '무왕이 아내인 선화공주와 사자사로 가던 길에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를 올렸고, 이곳에 절을 세우자는 선화공주의 간청에 무왕은 사자사 스님인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하룻밤 만에 절을 지었다. 미륵삼존을 본받아 금당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불렀다.’



왼쪽이 해체 이전의 서석탑(국보11호), 오른쪽은 현대의 기술로 재현해 놓은 동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이라 불리던 서석탑(국보11호)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무너져 내린 한쪽 면을 시멘트로 덧발라 놓은 것이다. 이 때문에 흉물스런 모습으로 남아있었으나, 2001년부터 해체를 시작하여 복원을 진행 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오는 탑양식의 변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236호)
서석탑의 안전한 해체를 위해 거대한 규모의 가림막이 설치되었다.  내부는 2층까지 관람이 가능하고, 한켠에 해체 과정에 대한 세세한 설명들을 기록물로 전시해놓았다.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미륵사지의 모형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영기. 앞뒷면에 193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사리의 봉안시기와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사찰을 조성했는지에 대해 기록되어있다.


금제사리봉영기의 번역글 (번역/김상현)

"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 근기(根機)에 따라 부감(赴感)하시고, 중생에 응하여 몸을 드러내신 것은 마치 물 가운데 비치는 달과 같았다. 이 때문에 왕궁에 의탁해 태어나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8곡(斛)의 사리를 남겨 삼천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마침내 찬란히 빛나는 오색으로 일곱번을 돌게 하였으니,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하였다.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써 오랜 세월동안 선인으ㄹ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승보(勝報)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 하셨다."
" 원하옵건데, 세세토록 공양하여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으로 우러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나란히 견고하고, 왕립은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크게 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다시 원하옵건데, 왕후의 몸에 나아가서는, 마음은 수경(水鏡)같아서 법계(法界)를 항상 밝게 비추시고, 몸은 금강과 같아서 허공과 같이 불멸하시어, 칠세를 영원토록 다함께 복리(福利)를 받고, 모든 중생들이 다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소서."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




고도 익산의 또 다른 백제 흔적들 

 익산 쌍릉(사적87호)은 무왕과 그의 아내 선화공주의 무덤이라 전해진다. 두 개의 봉분이 200m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데, 큰 것은 대왕묘로 무왕의 것, 작은 것은 소왕묘로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에는 이 능에 대해 “후조선 무강왕 및 비의 능, 속칭 말통대왕릉이라 한다.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이 서동인데 말통은 즉 서동이 변한 것이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장식이나 제단 등이 없어 왕릉이라 하기에는 조금 조촐한 느낌인데, 발굴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미 도굴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능산리 고분과 같은 형식의 굴식 돌방무덤이다. 인근의 마룡지는 일명 용샘으로 무왕의 탄생설화가 간직된 곳이고, 고도 익산의 방위를 담당하던 성곽들이 발굴과 보수를 거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익산토성(사적92호), 미륵산성, 낭산산성, 금마도토성 등이다. 웅포면 송천리, 조붓이 아름다운 잡목 숲을 지나면 정갈한 느낌의 산사가 나타난다. 천년고찰 숭림사다. 아담한 규모이지만 이 사찰 또한 미륵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사찰이다. 고려 충목왕 때 크게 중창된 적도 있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본전인 보광전(보물825호)만 남았고, 조선 순조 때 다시 중수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5년 7월 8일, 독일 본에서 개최된 제 39차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열두번째 세계문화유산이 지정되었다. 공주의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고분군, 정림사지, 나성, 그리고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를 포괄한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tory Areas)' 다.


삼국이 통일된 이후, 패전국 백제의 흔적들은 오랜 세월동안 파괴되거나 묻혀왔다. 그러나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는 몇몇 문화재들과 남겨진 기록들로 인해 그 우수성과 독창성이 입증되었었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계기로 잊혀졌던 백제의 아름다운 유물과 유산, 역사를 더 많이,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세세히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익산 일정  tip 

개략적인 답사일정

왕궁리 유적 - 동고도리 석불 - 익산 쌍릉 - 미륵사지 - 태봉사 - 연동리석불 - 숭림사 - 웅포 곰개나루 일몰


Point

- 익산의 답사일정 중 핵심은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다.

- 왕궁리 오층석탑과 주변 풍경은 아침이 특히 좋다. 부지런한 여행자라면 해가 떠오를 무렵을 적극 추천한다.

- 왕궁리나 미륵사지나 유물전시관은 꼭 들러볼 것!

- 마지막 일정은 고즈넉한 천년고찰 숭림사를 들러 웅포 곰개나루의 일몰로 마무리하는 것을 추천함.

- 웅포 캠핑장을 네비에 찍고, 도착하면 정자가 두 개 있다. 위쪽은 금강정, 아래쪽은 덕양정이다.

  어느 곳이든 일몰을 감상하기 좋다. 아래 사진은 덕양정에서 바라본 금강일몰..

- 덕양정 일몰을 보고 금강하구를 따라 나포를 거쳐 군산IC로 빠져나오는 코스도 좋다. 겨울 철새탐조 코스다.

  운이 좋으면 가창오리떼의 군무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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