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헴의 문화유산 답사
흘러간 시간들이 화석처럼 굳어진 공간. 사람이 떠난 빈 터에서 옛 시간의 흔적을 마주하는 일은 박물관을 돌아보는 여정과는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터 곳곳에서 옛 사람들의 정취가 함께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도 자취는 남아, 닿지 않을 것 같은 옛 시간과 오늘의 시간을 이어주는데, 그 적막한 공간 속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시간을 거슬러 만나게 되는 사람과 사람의 교감 때문이리라. 강산의 언저리에서 무수한 세월을 이고 건재하게 서있는 아름다운 유물들을 만나러 옛 절터로 떠나본다.
관동은 일반적으로 대관령의 동쪽지방, 즉 영동지방을 일컫는다. 이곳은 한반도의 중앙이나 내륙과는 별개의 풍경, 별개의 문화가 자리하였다. 대간을 너머 관동의 풍광을 보러 가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설레였던 모양이다. 옛부터 관동팔경이라하여 동해안 자락의 여덟 정자를 돌며 노니는 것을 선비들은 로망으로 여겼다. 관동의 관문인 강릉일대에는 유난히 많은 폐사지들이 있다. 굴산사지, 신복사지, 한송사지 등인데 아쉽게도 이 사찰들 또한 왜 폐사가 되었는지 전해져오는 이야기는 없다.
굴산사는 신라 말 문성왕 9년(847년)에 창건된 사찰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본산으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범일국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개국사라는 사찰에서 왼쪽 귀가 없는 한 승려를 만났다. 그 사람은 신라 사람으로 집이 명주(지금의 강릉)라고 했다. 그는 범일국사가 귀국하면 자신의 고향에 집을 지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귀국한 범일국사는 그의 청에 따라 그가 고향이라 일러준 사굴산 아래에 굴산사를 지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굴산사는 당시의 이지역 호족이었던 김주원의 후원아래 큰 명성을 떨쳤다. 당시엔 강릉 일대에서 가장 큰 사찰로 반경이 300m에 이르렀으며, 머물던 승려가 200여명에 다다랐다고 한다. 식사 때가 되면 절에서 쌀 씻는 물이 동해바다로까지 흘러들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당간지주와 부도 등 두 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보존되어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당간지주다. 자연석을 다듬어 놓은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높이가 5.4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당간이 만들어질 당시인 통일 신라의 기상이 느껴진다.
진전사지는 강현면 둔전리 설악산 화채봉 아래에 자리를 틀고 있다. 우거진 밭과 숲에 자리하여 한갓진 풍광이다. 진전사는 신라 헌덕왕13년(821)에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의선사는 당시 교종이 대세였던 신라불교에 선종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그가 신라에 들여온 선종은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르쳐,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 던 혜능스님과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임을 외쳤던 도일스님의 맥을 이어받은 남종선이다.
도의선사는 귀국하여 경전을 읽고 염불을 외우는 것보다 인간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중생이 깨닫기만 한다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리다. 이것은 매우 진보적인 입장으로, 지배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기존 불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배척당한 도의선사가 뜻을 품고 은신한 곳이 바로 진전사였다. 도의선사의 사상은 그의 제자 염거화상에게 전해지고, 다시 보조선사로 이어지며 맥을 이어간다. 보조선사에 이르러 선종은 지방호족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이때 신라 구산선문 중의 첫번째인 보림사가 창건된다. 이곳 진전사터의 유물들은 그래서 교종에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문화유산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구분할 때 그 문화재가 지닌 역사적 가치와 현 상태의 보존도에 따라 갈리는데, 진전사터 삼층석탑(국보122호)은 아마도 그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된 문화재가 아닌 듯싶다. 5미터가 넘는 높이에 살아나올 듯, 조각의 부조가 섬세하고 뚜렷하다. 이 조각들을 제대로 보려면 햇살이 알맞은 때에 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인데 아마도 정오햇살이 하늘꼭대기에 있을 때보단 오전 10시나 오후 서너 시쯤의 햇살이 좋을 듯싶다.
영동고속도로 속사를 빠져나와 양양으로 향하는 56번 국도는 강원도 산과 산마을의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길이다. 운두령을 넘고 구룡령을 지나면 양양의 가장 큰 물줄기인 남대천의 지류 미천골이 나온다. 국도가 뚫리기 전엔 그야말로 산간오지마을이었던 이곳은 휴양림이 들어서며 비로소 사람들의 왕래가 이어지기 시작한 곳이다. 선림원지는 물 맑고 숲 깊은 미천골 휴양림의 깊숙한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적막한 산중에 자리한 위치나 선림사가 아닌 선림원이라는 이름에서 아마도 이곳은 대중들을 위한 사찰이 아닌 스님들의 수행처였던 듯싶다. 자세한 절의 창건내력은 없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범종에 804년, 순흥법사가 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 당시에 창건된 사찰인 것으로 추정된다. 폐사된 연유도 남아있지 않아서 그야말로 산중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이 절터에는 모두 네 점의 보물급 문화재들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데 석탑과 석등, 부도와 부도비 등이다.
개략적인 답사일정
굴산사지 - 신복사지 - 진전사지 - 선림원지
Point
- 굴산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복사지가 있다. 푸근한 인상의 석불좌상과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 진전사지 삼층석탑의 조각은 사면의 햇살이 잘 드는 시각에 볼 수 있길..
- 선림원지는 미천골 휴양림 매표소를 지나서 들어간다. 미천골 휴양림에서 일박을 하면 좋겠지만, 주말 숙소잡기가 쉽지는 않다.
- 미천골 휴양림 숙소 예약은 국립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홈페이지 이용 http://www.huya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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