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차 : 전동킥보드 타고 티어가르텐 산책
2019/10/15
매주 화요일 오후 1시.
베를린 필하모니는 트리오나 콰르텟 정도의 구성으로 소규모 무료공연을 한다.
베를린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예약을 했던 건 베를린 필하모니 공연이었다. 꿈의 베를린 필을 베를린에서 직관한다는 것이 흥분되었고 특별히 주빈 메타 옹을 객원 지휘자로 모신 공연이었기에 더욱 기대감이 컸다.
보름 뒤에 있을 풀 오케스트라 공연은 물론이었거니와 시민들을 위한 소규모 무료공연 역시 기대되었다. 수준 높은 연주자들의 연주를 가까운 곳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연주자가 나올지, 관람객 연령층은 어떨지, 분위기는 어떨지 등등이 궁금했다.
오늘의 컨셉은 마치 베를린 시민이라도 된 듯 여유로이 공연을 즐기는 것이다.
포츠다머 플라츠 역에서 내리니 한번 와봤다고 벌써 낯이 익다. 이제 구글맵을 열지 않고도 알아서 갈아타고 내리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포츠다머 플라츠 광장엔 한국의 통일을 기원하며 지어놓은 통일정이라는 정자가 놓여있다. 그것도 베를린 장벽의 흔적이 남은 곳에 말이다.
과부 심정은 홀아비만 안다는 동병상련의 심정이란 이런 걸까.
색감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외관은 아쉬웠지만 시내 한복판에 타국의 통일을 기원하는 건축물이 있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소니플라자를 지나 대로를 걷다 보면 베를린 필 건물이 보인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처럼 멋진 외관은 아니지만 나름 개성 있는 건물이다. 독일의 실용주의 디자인은 정말 목적에 충실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입장을 하기 위해 입구에선 작은 플라스틱 티켓을 나눠준다. 받아서 들어가면 바로 그 티켓을 수거하며 입장을 허락한다. 이럴 거면 그냥 입장시키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한데 관객수 집계를 위한 것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공연은 홀에서 이루어지는데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좋은 자리들엔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계단 양쪽으로도 빼곡히 앉아있었고 2층도 난간이나 벽 쪽엔 자리가 없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이 노인 아니면 학생이라는 것이다. 노인이야 남는 게 시간이라 여기 와서 즐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이 자유롭게 와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공짜로 듣는다니.. 저들의 예술적 감성은 얼마나 멋지게 자라날까를 생각해보니 부러웠다.
늘 꿈꿔오던 클래식의 대중화가 바로 이런 그림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격식을 갖추어 듣는 클래식 공연도 좋지만 이렇게 편하게 널브러진 가운데에서도 연주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공연. 사장되어가는 국내 클래식 시장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중화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연주는 피아노와 트럼펫 구성이었다. 피아노도 대단했지만 트럼펫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웠었구나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베토벤, 생상,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선곡들도 맘에 들었다.
공연을 마치고 나면 연주자들이 자연스레 청중들과 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눈다. 학예회가 끝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 좋아 보였다.
샵에 들러 보니 사고 싶은 음반 및 상품이 많았지만 짐이 될 것 같아서 참았다. 다음에 올 때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허기져서 식당에 가보니 먹을만한 것이 별로 없어 보여 일단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화창해서 기분이 좋은데 바로 옆이 티어가르텐 숲이다. 마음이 가는 대로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노이쾰른을 갈까 했었는데 숲으론 간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엄마가 자전거 뒤에 어린 딸을 태우고 바이올린은 크로스로 메고 달린다. 멋지다.
숲으로 향하니 아들과 산책 온 아빠의 모습도 보인다. 베를린에서 많이 보이는 풍경 중 하나가 아빠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모습이다.
숲은 엄청난 규모였다. 서울숲을 생각하고 걷다 보니 답이 안 나왔다.
다리가 아파올 즈음 사람들이 자전거랑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안 타봤지만 도전해보기로 결심. 우버를 검색하니 10분 거리에 킥보드가 있었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다 보니 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를 새겨놓은 작은 기념탑이 보였다. 꼭대기에는 대부분의 기념탑이 그렇듯이 금색으로 장식된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다.
근처 잔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 노트북을 하는 사람... 모두가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한참을 사진 찍다가 다시 킥보드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내 킥보드 발견.
우버는 정말 편리하다. 앱의 UX도 깔끔하고 직관적이라 군더더기가 없다.
QR코드로 입력하면 바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며 작동된다. 가격이 좀 비싼 게 흠이긴 하다. 기본 1유로에 추가 1분에 0.15유로씩 붙는다. 기본요금 1300원에 1분에 200원 꼴이다. 한국 전동 킥보드도 비슷한 가격인 거 같다.
일단 결제는 시작되었는데 아뿔싸 타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연습을 좀 하고 오려고 했는데 미루다가 한 번도 못 타보고 온 것이다. 아... 사람들 많은 곳에서 킥보드 하나 붙잡고 헤매는 모습이라니...
아무튼 처음 타는 거지만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티어가르텐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킥보드로 이리저리 다니노라니 이보다 신나는 게 있을까 싶었다.
거대한 티어가르텐 숲 중앙에 있는 전승탑은 어떻게 가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킥보드와 함께라니 빠르고 즐겁게 갈 수 있었다. 한 10km쯤 신나게 달렸을까? 공원의 울퉁불퉁한 길에선 작은 바퀴가 영 맥을 못 추었다. 내친김에 공원 밖으로 나가 우버 자전거를 찾아 갈아탔다. 우버 자전거 역시 전동이라 매우 편리했다.
그냥 로그아웃하고 갈아타면 그만이다. 전동 공유 자전거와 공유 킥보드가 교통수단의 개념을 많이 바꿔놓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시 공원 안으로 진입했다. 이게 또 신세계다. 페달은 밟고 있는데 전기의 힘으로 나아가니 세상 편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내친김에 서점까지 가보기로 했다. 이유는.. 서점은 화장실이 무료이기 때문이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서점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베를린은 자전거 도로가 아주 잘 되어있어서 잘만 활용하면 대중교통보다 편하고 빠르다.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저녁으론 샐러드 패스트푸드 전문점에서 닭고기 샐러드를 시켰는데 고기는 맛있었지만 소스를 들이부었는지 너무 짜서 물을 부어 싱겁게 간을 하여 먹었다. 대체 왜 이리 모든 음식을 짜게 만드는 건지..
식당의 아이디어는 좋은 것 같았다. 각종 샐러드와 생과일주스를 파는 곳인데 건강이 주요 화두인 한국에서도 잘 먹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한 후 로션이 필요하여 DM에 들렀다. 종류가 너무 많아 뭘 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검색하다 몇 개를 샀는데 가격이 너무 싸서(1~2유로) 이래도 되나 싶었다. 발레아에 대한 평들이 워낙 좋아서 믿고 구매했는데 가격 대비 품질이 너무 좋아서 더 사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긴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니 옆집에 사는 집주인이 부탁했던 휴지를 갖다 주었다.
여행은 어땠냐, 이제 서울로 돌아가냐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화계에서 일한다는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어떤 영화에 참여했냐고 물어보았다. 그분은 “Dogs of Berlin”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제작에 참여했고 해외 영화에도 많이 참여한다고 했다. 해외에서 현지 영화계 스탭을 만나다니.. 꽤나 흥미로웠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 체크아웃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자기는 일하러 가니 키는 테이블 위에 두고 가라고 했다. 에어비앤비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상당히 쿨한 느낌이 있다. 좋은 분이라 헤어지는 게 왠지 아쉬웠다. 다음에 베를린에 오게 되면 다시 이 집을 예약하겠다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내일은 프라하로 간다. 체코에 대한 준비가 너무 안 되어있어서 꽃할배로 예습을 해봤다. 한국에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여기 와서 여행을 하며 꽃할배를 보니 내용이 별로 없다. 내용보단 캐릭터로 밀어붙이는 거다. 역시 요즘은 캐릭터의 시대구나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 영화든 예능이든 새로운 게 나오긴 어렵다 보니 결국 남는 건 캐릭터뿐인 거 같다. 캐릭터는 영원하다.
역시 인간은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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