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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 변호사 Jan 05. 2024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독서메모(829)

저자 : 패트릭 브링리

역자 : 김희정, 조현주

출판연도 : 원서-2023, 번역서-2023


주변에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 있다면 - 의외로 많지 않다. 내가 잘못 살았는 모양이다.^^ - 그 사람의 독서 취향이 무엇이든 간에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할 수 있다.

이 책은 에세이다. 실화란 뜻이다. 그러나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구조를 갖췄고 재미있다.


주인공(저자)에게는 두 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데다가 다른 과목 공부도 잘하는 머리 좋은 학생이었다. 운동도 잘 하였다. 배려심도 많았다. 이렇게 머리, 운동능력, 성격을 다 갖춘 형을 주인공은 우러러 보듯이 좋아했다.


그 형은 20대의 나이에 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분야는 생물수학이다. 순수수학이 아니라 생물수학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말하면 될까? 너나 내가 기계를 만든다면 논리적으로 접근하겠지. 최소한의 부품을 써서 깔끔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지만 살아 있는 자연은 전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아. 겹치는 것도 엄청나게 많고, 빙빙 돌고, 주제 하나를 놓고 수백만 개의 변형을 만들어내. 그래서 4분의 3쯤 잘못돼도 생명체는 죽질 않아. 그 결과로 생기는 게 골드버그 장치 같은 건데, 무지 튼튼한 골드버그 장치인 거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괴상하고 엄청나게 여러 겹을 가진 물건이 탄생하는 거야. 글자 그대로 상상이 불가능한 물건. 무슨 말이냐면 우리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엄청난 것이 작은 세포 안에 숨겨져 있다는 얘기야. 난 그게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어.”


잠깐 옆길로 빠지면, 하느님이 한 방에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최초의 단세포가 진화하여 모든 동식물이 생겼다는 진화론의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위 이야기에 담겨 있다. (최초의 단세포가 어떤 과정으로, 또는 어떤 이유로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종교가 힘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생물의 구조를 보면 매우 비효율적이고 겹치는 부분도 많다. 한 방에 완성품을 만들었다면 그렇게 만들었을리가 없다. 진화를 했기 때문에 이런 비효율적이고 중복되는 부분이 생겼다. 중세시대에 건축된 건물에 보일러 난방장치를 설치하는 경우와 요즘 새로 짓는 건물에 보일러 난방장치를 설치하는 경우는 많이 다를 것이다.


진화론의 근거는 금방 생각해도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오래된 지층에 고등생물(나중에 복잡하게 진화된 생물)의 화석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 지구상의 어떤 생물도 공통조상과 완전히 다른 또는 독립적인 구조를 가진 생물은 없다. 셋째는 위에서 말한 비효율적인 생물의 구조다.


아이러니 하게도 앞의 구조를 계속 덧씌우면서 만들어진 그런 비효율적인 구조가 주인공의 형이 말하듯이 생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가지게 해 주었다. 물론 여러가지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렇게 스마트 했던 형은 암에 걸렸고 2008년에 불과 27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는다. 주인공은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주인공은 권위있는 잡지인 The New Yorker에 입사한 4년차 직장인이었다. 주인공은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주인공의 표현을 빌면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한다.


그 일자리가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의 경비원이다. 주인공은 10년 동안 그 일을 한다.


이 책은 Met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에 대한 그의 감상, 경비원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밑줄치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다.


주인공은 10년 동안의 경비원 생활을 끝낸 후 뉴욕 도보 여행 안내원으로 직업을 바꾼다.


아래에 책의 일부분을 옮겨 놓는다.


****************


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낯설고 먼 땅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옆구리를 찌르는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 몇 주는 뇌가 반쯤 작동하지 않은 듯했다. 정말 그 정도로 몰두가 됐기 때문이다. 모든 그림이 ‘짠’ 하고 커튼을 열어 안을 보여주는 건물 1층의 창문들처럼 보였다. 보통 한 전시실에는 네 면의 벽에 걸쳐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의 금테를 두른 ‘창문’이 나 있다. 어느 창문은 돌벽을 단숨에 뚫고 바깥으로 이어져서 굽이치는 언덕과 요동치는 바다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다른 창문은 창틀에 턱을 받치고 들여다보라는 듯 집 안의 광경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혹은 고개를 들면 빤히 쳐다보는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 창문들도 있다. 그들은 코를 유리에 박다시피 하고 이쪽을 바라본다(그 창문에 유리가 있다면 말이다. 이 그림들에는 대부분 유리 한 장도 덮여 있지 않다).

베르나르도 다디에게 그림은 고통스럽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생각을 돕는 도구였을 것이다.


요점이야말로 예술이 절대 내놓지 않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말로 단번에 요약하기에 너무 거대한 동시에 아주 내밀한 것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각 예술은 그 획들을 화면에 잡아두며 끝나지 않는 공연을 펼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너그럽게 느껴진다.


곽희의 아들에 따르면 이 거장은 보통 수시간 동안 명상을 한 다음 손을 씻고, 팔을 휘젓듯 단번에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려냈다고 한다.


드디어 남자의 기세가 꺾였는데, 그가 전시실을 나서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어. 자기 아들을 보고는 "작은 사람들한테는 작은 힘이 어울리지… 인생이 그래." 기대했던 것만큼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이 무겁게 끝나자 사람들은 엄숙하게 고개를 젓고 “빌어먹을…”이라고 중얼거리며 이런 차원의 도덕적 부패에 대해 곱씹어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신발 바닥에 붙은 껌 같은 취급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한 번씩 당신은 경비원 따위일 뿐이라는 걸 아주 확실하게 상기시켜주는 녀석들을 겪지 않고는 경비원으로 일할 수 없다.


그물처럼 교차하는 선들로 세심하게 공을 들여 음영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서 로도비코가 한 가지 면에서는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업은 육체노동이었다. 반복적이고 지루하며 몸을 쓰는 노동. 숙련이 가능한 노동인 것은 확실하지만 지름길도 없고, 인내심을 가지고 한 획 한 획 긋는 것 말고는 일을 진척시킬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겸허한 작업인 것이다.


안전한 길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 차례 시도해서 다듬어 놓은 방식을 통해 복잡함을 제한하는 방법이다. 위험한 길은 시각의 한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펜으로 표현할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방법이다. 미켈란젤로는 아마 표현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과 사랑에 빠졌던 듯하다. 바로 약 6백 개의 근육과 약 2백 개의 뼈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 말이다.


그 말들을 생각하며 다시 쿡쿡 웃는다. 자신 없어 하는 거장(미켈란젤로)의 말을 듣는 것이 즐겁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말을 들으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전시가 시작된 후 내내 나는 미켈란젤로의 짜증과 절망이 섞인 편지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결과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 신이시여, 도와주소서!”가 제일 자주 눈에 띄는 대사다. 사실 그가 작업을 시작한 후 처음 몇십 번의 조르나타는 완전 실패였다. 회반죽을 제대로 바르지 못한 아마추어적인 실수 때문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작업을 포기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이 엄청난 커미션의 영광을 즐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종이 위의 무엇 하나 그냥 그린 건 없다. 한 획 한 획마다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에너지와 야심과 헌신이 깃들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빈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모든 근심을 잊고 혼신의 힘을 바쳐 주어진 과제를 해냈고, 씁쓸한 불평 따위는 일이 끝난 후에나 하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려운 일을 해내는 데 이보다 나은 방법이 또 있을까?


아무리 위대하다 칭송을 받는 그일지라도 결국 어린아이 같은 연습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는 사람인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


예술에 관해 내게 가장 큰 감명을 준 글은 1884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을 방문한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글이었다. 그는 늘 일행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하는 종류의 관람객이었던 듯하다. 1884년에 그와 함께 박물관을 찾았던 친구 안톤 케서마커스는 “그는 〈유대인 신부The Jewish Bride〉 앞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라고 썼다. 렘브란트의 작품이었다.  [그를 그 자리에서 떼어낼 방법이 없었다. 그는 그냥 그곳에 가서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다른 작품들을 둘러보러 갔다. “다 보고 와. 나는 여기 계속 있을게.” 그가 말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돌아가서 이제 다른 곳으로 좀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믿을 수 있겠어? 진심에서 하는 말인데 여기, 이 그림 앞에서 말라빠진 빵 조각이나 먹으면서 2주일 정도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 내 명을 10년은 단축해도 좋을 것 같아.”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 일어섰다. “하는 수 없지.” 그가 말했다. “여기 영원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많은 경우 예술은 우리가 세상이 그대로 멈춰 섰으면 하는 순간에서 비롯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진실되거나, 장엄하거나, 슬픈 나머지 삶을 계속하면서는 그냥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예술가들은 그 덧없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들은 덧없이 흘러가버리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도록 계속 아름답고, 진실되고, 장엄하고, 슬프고, 기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믿게 해준다. 그리고 이곳 메트에 유화물감으로 그려지고, 대리석에 새겨지고, 퀼트로 바느질된 그 증거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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