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종로 3가 서울극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기사를 읽고 나도 놀랄 정도로 가슴 한 켠이 찌릿했었다. 서울극장은커녕 종로 자체를 안 간지가 10년이 다 됐는데 참 새삼스러웠다. 완전히 문을 닫는 날짜는 8월 31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작년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고 코로나의 한복판에 있었다. 마스크 쓰고 대중교통을 갈아타며 아이를 데리고 거기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핑계지만 그래서 가지 못했다. 초라해진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괜히 달력의 날짜만 하염없이 지켜보다가 마음을 접었다.
서울극장은 내 학창 시절의 문화생활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전, 국내 유수의 영화들은 전부 여기서 개봉했고 주연 배우들의 무대 인사도 모두 이곳에서 했었다. 명실공히 영화계를 대표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종로는 젊은이들의 거리였다. 온갖 극장과 학원, 대형 서점, 먹거리들이 즐비한 데다 교통까지 편리해서 수업이 끝나면 거의 종로에서 약속을 잡았었다. 골목골목 구경할 건 왜 그렇게 많고 매연을 뒤집어쓴 채 늘어져 있는 군것질거리들은 왜 그렇게 맛나던지. 서울극장 앞에 늘어서 있던 군것질 매대도 나의 주식이었다.
지금은 딸린 식구가 있어 엄두를 못 내지만, 원래 나는 새 영화가 개봉하면 개봉 당일에 달려가서 보는 영화 마니아였다. 서울극장에 쓴 표값만 해도 계산해 보면 상당한 금액일 것 같다. 여기서 수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영화는 '텔미썸딩'이다. 당대 최고 톱스타였던 배우 한석규와 심은하가 주연인 범죄 스릴러 영화였다. 둘이 함께 출연한 '8월의 크리스마스'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그들이 함께 나오는 차기작에 영화팬들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OTT 등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작이 개봉하면 여지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날은 서울극장에서 '텔미썸딩'이 개봉하는 날이었다. 원래 개봉날은 관객이 몰리지만 그날이 특별했던 이유는 주연 배우의 무대 인사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종로 3가 지하철역 입구에서부터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주연 배우 중 심은하는 오지 못했고 한석규만 왔다는 안내가 나왔다. 서울극장 앞을 가득 메운 소녀팬들은 아이돌의 공연장인 것처럼 꺄아아악!! 소리를 질렀다.(나는 안 질렀다)
무대 인사를 하는 극장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한석규가 숨만 쉬어도 팬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정신없이 인사가 끝나고 그가 무대 뒤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순간, 나는 전혀 나답지 않은 행동을 개시했다.
같이 간 친구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평소 얌전한(?) 내 입에서 나오리라고 예상하기 힘든 말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보다 발이 빨랐다. 나는 벌써 그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있었다. 친구들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거리며 합류했다.
그를 쫓는 무리는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많았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 소속사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팬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이제 그만 가달라고 부탁했다. 길이 점점 미궁 같아지면서 하나 둘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끝까지 따라붙은 팬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리였다. 주동자는 나였다.
마침내 저만치 앞에서 그가 멈추었다. 이제는 자기들만 남았다고 생각해서인지 한시름 놓는 분위기였는데 그 앞에 우리가 들이닥쳤다. 지금 같았으면 톱스타 주변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타의 경호 체계를 잘은 모르지만 그때는 팬 문화도 뭔가 정스러웠던 것 같다. 관계자들이 난처해하긴 했지만 칼 같이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또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우리는 풋풋한 여학생들이었다. 미친 듯이 달라붙어 과도한 요구를 하는 골칫거리 팬도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딱 한 마디를 던졌다.
사진 찍겠다고 쫓아간 것도 아니었는데 평소 좋아해 마지 않던 배우를 지척에서 보니 입에서 저절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오빠, 사랑해요! 이런 말이 아니었던 게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극도로 난처해하며 연신 손사래를 치는 그에게 우리는 거의 두 손을 모아 비비는 지경까지 애원을 했다. 그러자 그가 매니저와 눈짓을 교환하더니 기적처럼 고개를 끄덕했다. 사실 들어줄 거라 크게 기대 안 했던 부탁이라 끄덕하는 그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만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그의 뒤로 후광이 내려왔을 것이다.
혹시나 번복할까 봐 우리는 재빠르게 그의 좌우로 포진했다. 총 다섯이었는데 나는 그의 바로 옆에 서는 행운을 차지했다. 나도 내 발이 그렇게 빠른 줄 몰랐다. 그 이전도 그 이후로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그때 속된 말로 눈이 뒤집혔던 것 같다. 매니저는 고맙게도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었다. 마지막 플래시가 터질 때, 나는 차마 부끄러워서 못한 짓을 과감히 시도했다. 살짝 그의 팔짱을 껴보려고 어정쩡하게 팔을 든 것이었다. 아까 뒤꽁무니 쫓아올 때처럼 이번에도 머리가 아니라 팔이 스스로 움직였다.
고맙다고 연신 허리를 굽히고 골목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신기한 건, 사진을 찍었던 순간만 기억나고 그 이후는 까맣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날 찍은 사진을 보고 슬며시 미소 지었던 것만 기억난다. 내가 그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성공한 것이었다! 각자 자기 표정 신경 쓰느라 내가 몰래 팔짱을 끼는 줄도 몰랐던 친구들은 사진을 보고 날 배신자라며 마구 샘을 냈다.
그 서울극장을 얼마 전 드디어 다시 방문했다. 몇 년 만인지. 한석규를 보겠다고 몰려든 팬들로 미어터지던 서울극장 앞마당은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부족할 만큼 적막하고, 버려져 있었다. 나는 싸한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어 괜스레 주변만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대한민국 영화계를 대표하던 아우라도, 거기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하던 북적거림도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서울극장 자리에 뭐가 들어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안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과거에 박제된 공간이었다.
서울극장이 무엇으로 대체되는지는 이미 내게 중요하지 않다. 서울극장이 아니면 그만한 가치는 내게 없으니까. 시대의 흐름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지만, 인정하면서도 슬픈 이유는 그것의 영광과 쇠락이 내 인생의 등락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은 아닐런지. 서울극장에 다녀온 날 밤 오래된 서랍을 열어 그날 찍은 사진을 찾아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사진이 거기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갑자기 생각이 나서 집을 싹 뒤집어엎었는데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극장은 언제부터 내게서 의미를 잃어갔던 걸까. 나는 언제부터 영화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걸까. 나는 왜 종로를 떠났을까. 그 추억을 공유한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한석규 배우님은 그 시절 서울극장 뒷골목에서 만났던 여학생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갖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날 밤은 잠을 잘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진을 꼭 찾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때문에 애가 탔다. 사진은 사라졌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그날 달아오른 내 뺨의 뜨거움까지 생생하다. 그러면 된 거겠지. 그러면 된 거겠지...... 이제는 서울극장 앞에 다시 가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