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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Feb 14. 2022

하이틴은 어리지 않다



<오징어 게임>에 이어 또다시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상당히 잘 만든데다가 메시지까지 담고 있어서 놀랐다. 좀비물이 하도 많아서 왠만한 설정은 식상한데, 교복에 피칠갑을 하고 괴물로 변한 친구들과 싸우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이 하도 강렬해서 끝까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우리 학교는>을 통해서 호치키스로 집어놓은 것처럼 사라져 있던 내 하이틴 시절을 기억해냈다. 내 하이틴은 대부분 대입에 바쳐졌다. 자판기에서 당시 유행하던 캔커피를 하나 뽑았다가 고등학생 주제에 벌써 커피를 마시는 내 자신이 날나리인 것 같아 한 모금도 못 마시고 그냥 버렸던 때가 열 여덟 살이었다. 답답하리만치 고지식했던 나는 내가 하이틴일 때 하이틴인 줄도 모르고 지났다. 중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문제집에 얼굴 처박고 새벽부터 밤까지 대학 입시만을 위해 달려가던 그때가 바로 인디언 썸머처럼 훅 지나가버리는, 20대보다 더 소중한 하이틴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하이틴을 지나오지만 나이가 들고 나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누구나 어린이였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어린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른이 된 지금은 그 나이 학생들이 아직 어리고 어른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걸로 생각됐지만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보여지는 열 일곱 살은 절대로 어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공격하는 괴물로 변해버린 끔찍한 학교에서 열 일곱 살들은 어른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아도, 심지어 버리고 가도 꿋꿋하게 일어선다.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신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통신선을 끊어 전화와 인터넷이 차단된 상황 속에서도 주변의 모든 사물을 이용하는 영리함과 지혜를 발휘할 줄 알고,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 서로의 갈등을 조율하고 해결해 더 나은 결과를 내려고 노력한다. 시시각각 생명을 위협하는 좀비 앞에서 절대 굴복하지 않고 끝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럼에도 극단적인 상황에 몰렸을 때 친구를 위해 희생할 줄 알고 누구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다같이 손 잡고 살아 나가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한다. 죽음과 절망 앞에서 하이틴은 매우 용감하고 정의로웠다.




지금 모습에 대비해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낯설지만 사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10대를 지나온 사람들일 거라 믿고 싶다. 그때는 순수했고, 정의로웠고, 친구가 소중했고, 함께의 힘을 믿었었다. 그들은 어리지 않았다. 유치할 정도로 어린 건 오히려 술수를 일삼고 서로 반목하고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등 돌리는 어른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조차 한때 순수의 시대가 있었다고 믿고 싶은 건 나도 그렇게 변했을지 모른다는 씁쓸함 때문이 아닐까.





비슷한 시기에 동계 올림픽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종목 불문하고 선수 소개할 때 나이를 보면 대부분 스물 안팎, 어떨 땐 열 아홉, 열 여덟도 있다. 저 어린 선수가? 하다가 문득 괜스레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 어린 선수들이 올림픽 무대에 서기 위해 노력한 시간은 10대였을 것이다. 한창 먹고 싶은 거 많고 하고 싶은 거 많은 나이에 먹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하면서 더 높은 곳을 향해 질주하는 의지력은 이미 그들이 어리지 않다는 걸 입증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압감 면에선 올림픽 무대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가벼운 일상의 것들조차 매번 실패하는 나는 나이만 먹고 어른다운 건 없는가 라는 자책이 든다. 나이만 먹은 어린이라니, 최악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맨 마지막 회에서 반장 남라가 하는 말에 이 드라마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학생이 그렇잖아. 어른도 아니고 애들도 아니고."




하이틴은 나이만 보면 어른도 아니고 애들도 아닌 게 맞다. 역설적이게도 그 불안정함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문 밖에 좀비가 우글대는 와중에 짝사랑하는 여학생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학생의 모습이 그렇고, 무모하리만치 집요하게 탈출하겠다는 의지가 그렇다. 앞뒤 가리지 않고, 마음이 끌리는 대로, 열렬하다. '어른'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지옥으로 변한 학교에서 그들이 가장 먼저 붙잡은 건 친구의 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지옥에서 탈출한다. 인간은 극단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본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보여준 하이틴의 본모습은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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