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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Oct 30. 202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나이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그 나이가 아니면 하지 않았을 선택, 그 나이이기에 하지 못한 선택들이 나오거든요. 여자 주인공 폴은 올해 나이 서른아홉, 여자로서의 전성기는 좀 지났다고 봐야 할 나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늙었다고는 할 수 없는, 자기 관리만 잘하면 아직 20대로 보일 수 있는 나이이고 그런 면에서 참으로 애매한 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사강이 폴의 나이를 서른아홉으로 설정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해요. 프랑스에도 아홉수라는 개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마흔을 목전에 둔 서른아홉이라는 나이는 남다르거든요. 아무리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는 해도 보통 젊은이라고 하면 2,30대를 가리키고 나이 앞에 '4'자가 붙는 순간 젊다고 할 수는 없는 연령대에 진입합니다. 그건 외모가 젊어 보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예요.  따라서 나의 의도와 상관 없이 마음가짐과 사고방식도 '중년'에 맞게 변화하게 됩니다. 좀 더 조심스러워지고, 모든 일에 열정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되죠.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제가 서른아홉이었을 때를 돌이켜 보았어요. 리즈 시절의 마지막이라는 슬픔과 더불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과 절박함이 있었던 한 해였어요. 그 마음 때문이었는지 서른아홉에 저는 제가 살고 싶었던 방향과 다른 선택을 했었는데 그것이 현재 저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더라고요. 그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는 훨씬 더 많이 살아봐야 알 수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서른,아홉' 이라는 드라마도 방영했었네요.(보지는 못했습니다)



폴의 직업은 인테리어 장식가입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외모에 이지적이고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예요. 자기 사무실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적당히 인정 받고 적당히 능력 있고 남들 앞에서 부끄럽지는 않은 딱 적당한 서른아홉 커리어우먼이에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는 표현이 좋겠네요.



혼자 있는 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거나 미술관 혹은 박물관을 다니고 음반을 듣는 등 조용한 성격에 예술을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MBTI 검사를 한다면 I 겠구나 싶은 캐릭터예요. 이혼 경력이 한 번 있고, 남자를 많이 사귀기보다는 한 남자를 오래 사귀는 스타일입니다. 작품 속 현재 만나고 있는 연인 로제와는 6년째 교제 중이에요. 계산해 보면 늦어도 33~34 무렵에 만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혼은 그 전에 했을 테니 결혼을 좀 이른 20대에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성격상 이혼하고 바로 또 결혼을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로제와 30대 초중반에 만나 내일 모레 마흔을 앞둔 나이까지 사귀는 동안 결혼 생각을 안 해보진 않았을 거예요. 결혼 경력이 있는 걸로 보아 비혼주의자는 아니고 이혼 경험 때문에 결혼을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대사나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로제의 바람끼를 알면서도 모른 척 눈 감아주고 떠나지 못할 정도로 리스크가 큰 불 같은 사랑보다는 안정적인 관계에서 오는 '서글픈 행복'을 쉽게 놓을 수 없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고지식한 여자예요. 하지만 로제의 바람끼는 멈추지 않고 그렇다고 그런 로제를 놓지도 못하는 '무언가가 죽어버린 듯한' 관계에서 오는 상실감과 허무, 고독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그녀는 로제에게 설명할 수 없으리라. 자신이 지쳤다는 것,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를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유는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이 아니던가."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p11-



그때 스물다섯 살의 시몽이라는 남자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새로운 사랑이 무려 열네 살 연하라는 점 역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시몽의 나이에 대한 이야기는 시몽 인물 탐구에서 따로 해볼게요. 날것 그대로의 사랑을 감춤 없이 그대로 내보이며 달려드는 한참 어린 연하남에게서 폴은 로제로 인해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치솟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예전에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추앙'이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와요. 그냥 사랑은 안 돼. 추앙해요. 여주인공 미정이 구 씨에게 이렇게 요구하는데요, 미정은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주지 않는 남자친구에게 헌신하다가 돈까지 뜯겨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한 상태예요. 그 구겨진 자존감을 또 다른 남자 구 씨의 '추앙'으로 회복하고 싶어하죠. 매우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살면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본 경험 있으시죠?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소중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 기억나시나요? 저는 이 대사를 들으면서 그 기분이 떠올랐어요. 사람이 죽을 때까지 가져가는 기억은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사랑 받았던 기억이라고 해요. 사랑 받는 느낌, 추앙 받는 느낌은 이토록 큰 힘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폴이 시몽을 이용하는 듯 보이는 행동들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폴은 시몽과 만나주다가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가 일관되지 못한 태도를 보이며 시몽을 혼란에 빠뜨려요. 분명한 건 폴의 심리가 양다리를 걸치고픈 마음과는 다르다는 거예요. 폴은 양손에 사과를 쥐려는 심보가 아니라 혼란에 빠진 거예요. 앞에서 폴이 보수적인 여자라고 말했죠. 폴은 시몽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요. 연인은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데도 폴은 홧김에조차 바람을 피우지 못해요. 결단코 불장난은 할 수 없는 여자예요. 그런 여자이니 연인 로제의 바람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또 하나, 폴은 열네살이나 어린 시몽을 만나도 될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나이 차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해요. 작품 전반에 걸쳐서 나이에 대한 언급이 계속 나옵니다.



"이 어리고 혈기 왕성한 청년이 자신의 이야기, 자신과 로제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p68 -



"그녀는 그의 이마와 두 뺨에 키스했고, 순간적으로 그런 자신이 마침내 모성의 경지에 이르렀노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에게 잔인한 일이었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p132 -




그러다가 폴과 시몽의 관계가 전환되는 사건이 발생해요. 디너 파티 자리에서 일찍 자리를 뜨는 로제를 따라나간 폴은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에게로 가버린 로제를 보면서 그동안 쌓여온 감정이 폭발하고 말아요. 그때 시몽이 나타나고 폴은 그에게 먼저 키스를 해요.  배신감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거든요. '해버렸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어요.



스킨십의 큰 단계를 넘어 금세 발전할 것 같았던 둘의 관계는 그러나 폴이 한 발 다시 물러섬으로써 고착 상태에 빠져요. 폴은 시몽에게 만나지 말자는 전갈을 보내요. 그에게 점점 집착하게 되는 자신이 두려워졌기 때문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좀 답답하죠. 유부녀도 아니고 불륜도 아닌데 그냥 끌리는 사람에게 가면 안 되나 싶죠. 하지만 그게 죽어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으면서 폴이 왜 그렇게 오래된 연인과의 관계를 놓지 못할까 계속 생각했어요. 후반부에 폴이 스스로 그 대답을 해주었어요.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럽고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p146-147




로제는 아예 폴을 혼자 내버려두었고 폴은 배신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부림쳐요. 로제는 폴의 고상함을 가장 좋아하는데 폴은 그 고상함을 벗어던지고 그의 바람끼를 까발리며 쌍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참아내죠. 로제에게 끝까지 바닥은 보이고 싶지 않은 심리예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심리.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위 대사에도 나와 있듯이 사랑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깊은 내면에서 비롯된 행동이에요. 폴은 반드시 했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한 갑갑함에 눌린 채 무슨 일이든 일어났으면 싶은 심정으로 결국 시몽을 받아들여요.



폴의 현재 심정으로는 시몽에게 설복당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당신을 사랑해서 행복하다고 당당히 말해주는 시몽을 보면서 로제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혼자 애쓰느라 지쳐있던 그녀는 관계의 완벽함 같은 걸 느껴요. 그러나 애인이 있는 상태로 다른 애인으로 갈아타려는 듯한 자신의 마음이 여전히 불편하고 보기 싫어요. 시몽을 볼 때만 잠깐씩 불꽃처럼 일어나는 환희와 행복의 느낌 속에서 폴은 어느 새 그와의 관계가 발전됐을 때 들려올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요. 이혼했을 때도, 로제에게 배신당했을 때도 입방아를 찧어대던 주변 사람들이, 이제는 로제와 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열네살이나 어린 남자와 만난다고 하면 뭐라고 떠들어댈지 그 생각만 하면 시몽과의 관계가 다시금 망설여져요.



결국 폴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결말을 스포하자면, 폴은 불 같은 열정을 바친 시몽을 버리고 오래된 연인 로제에게로 돌아갑니다. 뻔한 결말이 아니라서 쇼킹했지만 폴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니 이해가 되었어요.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다. 그녀는 "그래, 그래, 그러자, 로제."라고 맞장구쳤다.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p156



로제의 바람끼는 변치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택한 폴이 안타까웠어요.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어요. 폴의 선택에는 나이가 키포인트예요. 폴 역시 스무살 때는 행복을 위한 의지와 자신감이 불타오르는 사람이었지만, 결혼과 이혼을 겪으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를 먹으면서 새로운 것을 개척하기보다는 있는 것을 지키는 쪽으로 삶과 타협하게 됐어요. 로제는 모든 면에서 그녀가 회의 없이 받아들여 온 기준에 완전히 부합했어요. 특히 나이, 로제는 폴보다 나이가 연상이었어요. 폴은 그런 로제와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지키려 한 로제와의 관계가 사랑이나 행복 자체보다 더 소중해졌어요. 이것이 맞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폴에게는 그랬어요.



폴은 잠든 시몽을 보면서 젊은 자신을 보는 듯 느꼈고, 떠나가는 시몽에게 자신이 늙어버린 것 같다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내뱉어요. 슬픔에 겨운 시몽의 뒷모습이 기뻐 보인다는 착각을 하면서 폴은 마지막까지 그의 나이를 강조합니다.



"시몽, 시몽." 그런 다음 그녀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덧붙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p158-



폴은 '스물다섯살'인 연인을 보내주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폴은 그런 여자예요. '십 년 후에도 시몽이 나를 사랑할까?'라는 자문에 스스로 아니라고 대답할 만큼 남자의 사랑은 덧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왜 그럴까요? 아마도 20대에 선택했던 결혼이 실패하면서 폴은 사랑의 덧없음을 이미 제대로 학습한 것 같아요. 더군다나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열네살 연하의 연인의 사랑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퇴화할 거라는 확신도 자연스레 생겼겠죠. 로제 역시 사랑의 덧없음을 잘 보여주는 연인이지만 그들은 함께 한 시간이 있고 서로에게 익숙하며 (아주 중요한 포인트인) 나이도 연상이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조금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또 한편으로는 로제의 배신에는 익숙하지만 시몽의 배신은 너무나 큰 충격일 것이고 새로운 연인에게서 새로운 배신을 감당하기엔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또 나이!)고 생각했을 수 있어요. 마흔 넘어 20대 남자에게 버림 받는 꼴은 자존심 강한 그녀가 이겨내기 힘든 고통일 겁니다. 어쨌든 그래서 폴의 선택은 이해가 갑니다.



여러분은 폴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불 같은 사랑에 리스크를 거느냐 vs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지만 결국은 내게로 돌아오는 오래된 연인의 손을 잡느냐. 그리고 그 불 같은 사랑이 그냥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열네살 연하의 남자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쉽게 결론이 나오는 질문은 아닐 거예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처럼 이 질문으로 여러분이 잊고 있던 그 무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다음 화에서는 연하남 시몽 이야기를 해볼게요. 이 친구, 아주 재미있는 캐릭터입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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