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창가 Aug 27. 2021

직장 상사에게 들은 가장 모욕적인 말

드라마 <미생> 中 혼나는 장그래 - 내 이야기와 아무 상관없음



나는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전 한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취직은 갑작스러웠다. 직장 생활을 그만둔 지 한참 됐을 때였는데 집안에 안 좋은 일이 몰아닥쳤다. 불행은 절대 혼자 오지 않고 손 잡고 떼거지로 온다더니 정말 맞는 말이라는 걸 몸소 실감하던 시절이었다.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식사와 잠까지 고통에 잠식당해 불가능해지자 살기 위해 수를 내야겠다는 절박감이 온몸을 에워쌌다.



삶이 날 배신할 때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을 택한다. 미친 듯이 울기도 하고, 훌쩍 떠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끝도 없는 하소연을 쏟아내기도 한다. 나는 지금 생각해 보면 제법 건전한 방법을 선택했다. 기특하게도 취직을 하기로 했으니.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바로 잡아서 딴생각이 들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컸다.



하루라도 빨리 일상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지상 최대 목표였기 때문에 당장 취직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구직 사이트를 딱 하루만 검색하고 바로 면접을 볼 수 있는 곳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면접관들 앞에 앉아서 중요하지 않은 질문들에 대답을 했고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합격 소식을 들었다.



출근 첫날, 나는 직속 상사인 부장과 면담을 했다. 부장은 면접장에서 직접 나를 뽑은 그 사람이었다. 후덕한 얼굴에 목소리가 점잖은 분으로 인상이 좋은 편이었다. 부장은 자기 책상 앞에 의자 하나를 갖다 놓더니 나더러 앉으라고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설명을 직접 하려는 걸로 생각한 나는 가져간 노트를 펴고 볼펜을 딸깍 눌렀다. 그런데 부장의 첫마디가 날 당황시켰다.



"이 팀은 곧 없어질 팀이야."

"...........네?"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는 날 보며 부장은 설명조차 귀찮다는 듯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이 회사에서 점 같은 존재란 뜻이야."



손에 들고 있는 볼펜이 민망했다. 의욕적으로 필기하려 했는데 '나는 점 같은 존재다'라고 받아 적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노트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모니터를 향했던 부장의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점 알지, 점? 응, 거기 잘 찍었네. 그 점이 맞긴 한데 그거랑은 좀 달라. 뭐냐면......"



그러더니 갑자기 책상 위 필통에서 연필을 한 자루 꺼내서 내 앞에서 흔들었다.



"연필로 그린 점. 지우개로 쓱 문지르기만 해도 없어져서 흔적조차 안 보이는 그런 거 있지? 당신이 지금 볼펜으로 찍은 점보다도 못한 거지."

"아, 네에..."



나는 황급히 점 찍던 동작을 멈췄다. 내 머리가 아니라 손이 찍고 있던 점이었다. 부장은 약 30분에 걸쳐 내가 뽑힌 팀이 회사 내에서 얼마나 '하찮고 존재감이 없는지' 역설했다.



부장의 '점 드립'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왔다. 아마 내 얼굴만 보면 점 얘기가 하고 싶은지 계속 '당신은 점 같은 존재'라는 걸 각인시켰다. 어차피 청운의 푸른 뜻을 품고 입사한 게 아니라 직장 내에서 존재감을 떨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지우개로 쓱 지우면 없어지는 쓸모없는 존재인 줄은 몰랐다. 분명히 그날 면접장에선 나 이외에 5명이 함께 면접을 봤고, 내가 속한 팀의 '점 같은 존재'는 나 포함 무려 5명이었다. 그럼 이 회사는 아무 필요도 없는 직원들에게 왜 매달 인건비를 쓰는 걸까? 회사의 경영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까지 들었다.



근무 기간이 어느 정도 되자 부장의 점 드립은 좀 더 수위가 높아졌다.



"근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네, 물어보세요."

"당신들, 그거 받아서 생활이 되나?"



여기서 당신들이란 나 포함 점 같은 존재 5명을 말한다. 여러 명이 함께 식사 중이었는데 내 얼굴은 의지와 상관없이 붉어졌다. 옆 사람들도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식사에만 열중했다. 참으로 거북스러운 순간이었지만 나는 어색해지는 것조차 부끄러워서 그냥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부장은 나중에 가서는 뇌가 없는 사람처럼 아무 말이나 막 던졌다.



"근데 그 나이까지 뭐 했길래 아직도 이런 일 해?"



그때는 회의 중이었는데 다른 직원이 화제를 얼른 딴 데로 돌렸을 정도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결국 나는 그날 체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소화제를 사야 했다.



'이 나이에 생활비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연필로 찍은 점'인 나는 그러나 그 부장 덕분에 다행히 그 시절 나에게 닥쳤던 많은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매일 무시당하고 열 받고 황당하느라 정신이 분산됐기 때문이다. 이걸 고마워해야 할지 욕해야 할지는 아직까지 판단이 안 서지만, 어쨌든 그랬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미술용 톰보 지우개



1년 동안 점으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마치고 나온 나는 몇 년 후 우연히 회사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지우개로 쓱 지우면 흔적조차 없어질 거라고 했던 그 팀은 없어지기는커녕 직원이 2명 늘었고, 직원이 그만둘 때마다 바로 이어서 직원 채용 공고를 내고 있었다.



지우개도 종류가 여러가지인데 아마 회사에 잘 지워지는 지우개가 없었던 것 같다. 퇴사하면서 미술용 지우개를 사 주고 나왔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쓱 문지르기만 해도 완벽하게 깨끗해져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톰보 지우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점 드립을 던지던 부장은 퇴사했다고 한다. 점 좋아하다가 자기가 점이 되기로 한 건지.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어떤 이유로 퇴사했든 부장의 앞날을 축복한다. 어쨌든 그 시절 본의 아니게 날 위로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도 앞으로는 어디 가서 점 얘기 하지 마시길. 듣는 사람 기분 '점' 같거든.





 

























그 나이까지 뭐 했길래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