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정신(craftsmanship)을 선망한다.
한 가지 일에 정통하며, 철저한 직업정신에 입각한 태도로 사명을 다하는, 기술적 윤리적으로 완성된 사람을 일컫는 '장인'을 존경한다. 그래서 나는 장인정신을 지켜보고, 그들 가까이서 체험하는 것을 즐긴다. 최근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를 재미있게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행동과 말을 보고 듣고 싶다. 돈을 주고서라도 경험하고 싶다. 인간은 그런 경험을 통해 정신적으로 고양되고, 지적으로 성장한다고 믿는다.
한 분야의 장인을 만나, 겪고, 정신적인 고양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연주회나 공연 관람이다.
며칠 전, 도반인 ‘O’의 소개로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는 인상적인 자리에 다녀왔다.
한 분야에 진심인 전문가들이 모여 제품(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바로, ‘트렁크 쇼’
트렁크 쇼란, 패션 분야에서 기성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에 국내외 재단사나 브랜드를 초청해 개별 주문을 받는 이벤트로, 옛날 외판원들이 큰 트렁크에 물건을 채워 들고 다니던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나무위키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트렁크 쇼
의상이나 보석 등 신제품이 출시되었을 때 소수의 상위소비자 (VVIP)를 위해 개최하는 소규모 패션쇼를 말한다. 이때 소량의 컬렉션을 트렁크에 넣어 가져오곤 해서 트렁크 쇼라고 부른다. 초우량 고객에게 집중적인 서비스를 제공해 매출을 올리는 마케팅 기법이다.
트렁크 쇼는 보통 백화점 특별룸이나 호텔, 플래그십 스토어 같은 엄선된 공간에서 최상위 고객들만을 대상으로 이뤄진다. 프라이빗한 행사이니 만큼 초청되는 고객들은 대부분 해당 브랜드 매출에 크게 기여하는 큰손들이며, 쇼가 끝난 뒤 엄청난 구매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런웨이 모델들이 제품을 들고 포즈를 취하거나 워킹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매스티지 브랜드에서는 프라이빗 쇼룸이 아니라 팝업 스토어 형식으로 진행해서 홍보효과를 노리기도 한다.
단순한 매출뿐 아니라 브랜드와 로열티 높은 고객이 직접적으로 소통 가능한 기회이기 때문에 마케팅/PR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
‘O’는 한 브랜드의 VIP이다.
‘O’가 초대된 트렁크 쇼를 같이 관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을 찾았다.
브랜드 매니저의 안내에 따라 ‘퍼스널 쇼핑 룸'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지금까지 백화점에 이런 공간이 있는지도 몰랐다.
입장하면 프라이빗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다.
편안한 분위기의 실내에 안락한 소파와 세련된 테이블이 놓였다. 그 위에 맞춤을 위한 카탈로그 들과 원단 샘플들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한쪽에는 신상품과, 국내 매장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제품들이 옷걸이에 가지런하게 걸려있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안정적인 톤이다.
커피와 샴페인, 위스키 등 마실 것들과 핑거푸드가 제공된다.
가볍게 이야기 나누며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캐주얼한 업무 미팅 느낌도 났다.
이곳에서 고객은 브랜드 매니저(이탈리아에서 직접 온 담당자도 있었다.)들의 설명을 듣고, 원하는 디자인 혹은 원단 등을 골라 직접 주문할 수 있다.
카탈로그는 매우 구체적이다. 안감을 포함한 디자인에 색상 이미지와 더불어, 원단까지 모두 만져볼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더 자세한 사진은 브랜드 내부 정보가 노출될까 봐 올리진 못하겠지만, 저런 분위기에서 두 시간이 넘게 트렁크 쇼는 진행되었다.
브랜드의 역사와 제품 소재의 가치를 비롯한 다양한 정보를 직접 묻고 들을 수 있다. 브랜드와 패션 산업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브랜드 전문가들이다 보니, 수준 높은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예의 바른 매너와 넘치는 배려로 인해 굉장히 안정적이고 편했다.
물론, 마지막엔 고객의 구매도 같이 이루어진다. 선택, 체촌, 결제까지 저 쇼룸에서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긴 시간이었지만,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치 한 편의 오케스트라 공연을 본 듯한 느낌이다.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갖춘 전문가들. <우리는 단순한 디자인 브랜드가 아닌, '원단을 만드는' 회사>라는 자부심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이런저런 화려한 패턴으로 승부를 보는 것을 넘어서, 근본 재료가 되는 원단까지 직접 생산하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전문가들이 모여 고객에게 맞는 제품을 추천하고 구매까지 한 플로우에 이어지는 협업의 오케스트라. 관람이 끝나니, 음악회나 전시회를 본 듯 정서적으로 고양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충만한 만족감을 느낀 건 물론이다. 좋은 기회를 준 ‘O’에게 감사하다.
오늘도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