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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셜리 Jun 28. 2024

사우스뱅크 파크에서 새에게 공격당할 확률은?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걸로

2024년 1월 12일 브리즈번


싱가포르에서 브리즈번까지 약 7시간의 지루한 비행을 마치고 새벽 5시, 드!디!어! 꿈에 그리던 호주 땅을 밟았다. 호주는 입국심사가 워낙에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컵라면 하나도 안 싸 오고, 혹시라도 마약이라고 오해할까 봐 노세범 파우더도 망설이다 결국 두고 온 터였다. 그래도 타국에 와서 아프면 큰일이니 비상상황을 대비하여 상비약만 간단히 챙기고, 생전 처음으로 의약품 리스트까지 만들어서 갔다. 상비약이라 체크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입국신고서에도 의약품 있음에 체크를 하고 (for emergency)라고 까지 써 놨다.


두근두근. 자동입국심사를 받으려고 여권을 스캔하는데 이상하게 안 되더니 결국 대면 입국심사 당첨! 긴장한 채로 심사대 앞에 섰는데, 입국신고서를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다른 질문 없이 'good job!'이라며 가란다. 엥? 이렇게 쉽게 끝난다고? '호주 입국심사 별거 아니네~ ㅎㅎ'하며 나오는데 웬 제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오더니 입국신고서를 보여달란다. 의약품에 체크한 걸 보더니 약품 리스트를 보여달란다. 호주 여행 카페에 올라온 글을 보면 상비약이라고 말하면 그냥 통과시켜 주기도 했다던데, 우린 아니었다. 같이 간 친구는 처방받은 약이 있었는데 영문으로 된 처방전을 보여달라고까지 했다. 뭐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구나 싶지만 그래도 캐리어를 열어서 보여달라고 안 한 게 어디냐 하며 한숨을 돌렸다.


공항에서 유심을 사서 끼우고 우버를 불러 호텔로 갔다. 워낙 이른 시간에 도착하긴 했지만 혹시나 투숙객이 많지 않으면 얼리 체크인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운도 없게 호텔 앞에 대형버스가 여러 대 서 있다. 하필 단체 관광객이 있었나 보다. 프런트에 물어보니 아쉽게도 얼리 체크인이 안 된다며, 비행은 어땠는지, 브리즈번 여행이 처음인지 다정하게 물어봐 주신다. 믿을 수 없지만 룸 청소가 끝나면 바로 연락을 주시겠다 하셨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대한항공 승무원들을 로비에서 만났다. 여기가 대한항공 승무원 전용 숙소인가 보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별도의 체크인도 없이 유유히 캐리어를 끌고 룸으로 올라갔다. 아... 부럽다...

우린 로비에 있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짐 정리를 한 다음 캐리어를 호텔에 맡기고 브리즈번 여행을 시작했다.


밖을 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비행기에서 1박을 한 셈이니 꼴도 말이 아니고 비몽사몽인데 비까지 내리다니...  게다가 친구의 폰이 먹통이다. 유심을 다시 끼워 봐도, 전원을 껐다가 켜봐도 안 된다. 호주 여행 시작부터 되는 일이 없다.


어찌어찌 우버를 불러 사우스뱅크 파크로 갔다. 날이 개길 기대 했으나 부슬부슬 계속 비가 내린다. 심지어 바람도 분다. 공원은 엄청 넓었고, 꽃과 나무는 너무 멋졌으나. 친구의 휴대폰은 먹통이지, 내 폰은 배터리가 거의 없지. 이러다가는 이따가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도, 우버를 부를 수도 없게 생겼다. 불안, 초조.....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직 내 배터리가 남아있을 때 차라리 우버를 불러 공항으로 다시 가서 유심을 바꿔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제일 가까운 유심 가게를 찾아가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극적으로 친구의 휴대폰이 살아났다. 휴... 정말 다행이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지만 그제서야 공원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보인다. 이제 제대로 된 여행을 시작해 볼까?  공원을 걷고 있는데 이름 모를 새들이 보인다. 이건 무슨 새인가 하며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내 눈 언저리를 치고 간다. 새였다. 말도 안 되지 않나? 호주에 온 첫날, 공원을 멀쩡하게 잘 걷다가 새한테 공격당할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새똥을 맞았다는 사람은 봤어도 멀쩡히 걸어가다가 새한테 얼굴을 공격당하다니... 다행히 살짝 발톱으로 스치고 지나간 거라 피가 나지는 않았다. 정말 어이가 없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난다.


새는 새고 그래도 구경은 해야지. 일단 공원의 상징인 브리즈번 조형물이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 이걸 봐야 내가 브리즈번에 왔다는 실감이 날 것만 같았다. 공원 곳곳을 누비다가 'Brisbane'이라고 써 있는 큰 조형물을 찾았다. 막상 보니 그렇게 멋지거나 예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날씨가 흐려서 더 그렇게 보였을 거다. 그래도 사진을 좀 찍어보겠다고 이 각도, 저 각도로 수십 장을 찍었으나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아무리 찍어도 안 된다. 인터넷에서 봤던 그런 사진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포기!

일단 사진을 포기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찾아봐도 공원 안에는 막상 먹을 만한 곳이 없다. 비가 오니 멀리 가기도 어렵고 해서 공원 안에 있는 스낵바 같은 곳으로 갔다. 햄과 치즈가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하나에 만원이란다. 호주 물가가 비싸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볼품없고 맛없는 샌드위치가 만원이나 한다니... 투덜거리며 먹고 있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친다. 야외석에 앉았는데 비바람은 몰아치지, 샌드위치는 비싼데 맛은 없지, 쓰레기 새라고 불리는 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호주에 온 첫날인데 호텔에서부터 시작해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비도 계속 오고, 안 되겠다. 일단 호텔에 가서 잠이라도 자야겠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맑아졌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니!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겁다. 침대에 누워 2시간 동안 잠을 잤다. 아니 누워있었다는 표현이 맞다. 일어나서 커튼을 열어보니 날씨가 더 좋아졌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도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까 이렇게 날이 좋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간이 애매해서 멀리 갈 수도 없으니 호텔 바로 근처에 있는 로마파크로 갔다. 그냥 동네에 있는 공원 같은데 규모가 엄청나다. 나무의 크기도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즈였다. '역시 호주는 스케일이 다르구나' 감탄을 하며 공원을 산책하려는데 갑자기 친구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악!''

''왜 그래?''

내가 돌아보는 그 짧은 시간에 친구의 다리에 상처가 생겼다. 우리 앞에는 바위도 나무도 아무것도 없는데 이 상처는 왜 생긴 거지? 그러다 바닥을 보니 뭔가 동그란 돌기둥 같은 것이 바닥에 박혀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이제야 왜 상처가 생겼는지 알겠다. 공원에 자전거나 차량을 출입을 막는 원기둥 같은 것이 몇 개 있는데, 이게 평소에는 바닥으로 내려가 있다가 뭔가 센서가 작동하면 위로 올라오게 되어 있나 보다. 친구가 지나가는 찰나에 오작동을 한 건지 그 원기둥이 튀어 올라왔고, 거기에 친구의 다리가 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순식간에 원기둥은 바닥으로 다시 내려간 거다. 대체 얼마나 운이 나쁘면 이런 거에 부딪힐 수가 있는 거니....


시간이 지나니 원기둥에 부딪힌 친구의 다리가 조금씩 부어오르고, 아프다고 했다. 더 이상의 산책은 무리다 싶어서 잠시 쉬었다가 공원에 있는 의무실을 찾아갔다. 의무실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아저씨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상처를 보여주자 열쇠 꾸러미를 가져와서 이중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캐비닛을 열고 이것저것 꺼내신다. 자기는 원래 오늘 근무가 아닌데 대신 근무하는 거란다. 그 말을 들으니 더 믿음이 안 간다. 엄청 큰 통에 들어있는 에탄올을 키친타월 같은 거에 묻혀서 소독을 해주더니 알 수 없는 약을 바르고 엄청 큰 거즈를 붙여준다. 혹시 모르니 연락처를 남겨주면 자기들이 연락을 하겠다나 어쨌다나.

플라시보 효과인지 그래도 약이라고 바르니 아픈 게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단다. 날씨가 좋은데 호텔로 돌아가자니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골드코스트로 가야 하니 오늘이 브리즈번의 첫날이자 마지막 날인데 이대로 가면 브리즈번에 대해 안 좋은 기억만 남을 것 같았다. '다시 사우스뱅크로 가? 말아?'고민을 하다가 다시 올 수 없으니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말에 의기투합하고, 다시 사우스뱅크 파크로 가기로 정했다.


우버를 부르고 공원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쉬려고 하는데, 약간 집시풍의 옷을 입고, 짐을 잔뜩 끌어안고 있는 노숙자로 보이는 여자가 담배를 뻑뻑 피면서 우리 보고 계속 뭐라고 뭐라고 하며 화를 낸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여기는 내 구역이니 여기에 앉지 말고 가라 뭐 대충 이런 얘기 같았다. 아니 우리가 자기가 앉아 있는 벤치에 앉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 옆옆에 있는 벤치에 앉겠다는데 뭐 이런 무경우를 보았나. 우리가 무시하고 계속 앉아있으니 이제 욕까지 한다.

다행히 우버가 바로 도착한다고 해서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 미친 여자에게서 멀어지면서 우리만 들리게 '유 헤드 빙빙?'이라고 작게 소곤거리며, 귀 옆으로 검지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지나고 나면 이 순간도 추억이다 싶어서 그 여자 사진을 몰래 찍었는데, 나중에 확대해 보니 우리 제스처를 알아챈 건지 우리 쪽을 보고 째려보고 있었다. 신기하네. 어떻게 알았지? ㅎㅎ


우버를 타고 가는 길에 하늘을 보니 이쪽은 괜찮은데 사우스뱅크 파크 쪽 하늘만 먹구름이 보인다. 불길하다. 설마 또 비가 오는 건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도착하니 날씨가 흐리다. 박두진의 '해야 솟아라'를 중얼거리며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비가 오락가락한다. 그래도 계속 내리는 건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이 마침 금요일이라 플리마켓이 열린단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사람들도 많고, 아기자기한 물건들도 많고,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여기도 불금은 불금인가 보다. 식욕이 돋는다.

플리마켓 골목 식당가를 한 바퀴 쭉 둘러보다가 대기줄이 그나마 길지 않은 베트남 식당으로 갔다. 날도 흐리고 국물 먹은 지가 오래된 것 같아서 메뉴판을 보고 소고기 쌀국수와 후라이드치킨라이스를 시켰다. 얼마 후 음식 나왔는데 쌀국수에 국물이 없다??

"이거 우리가 시킨 거 아닌데요?"

당당하게 얘기를 했는데, 메뉴판을 다시 보여주더니 우리가 시킨 게 맞단다. ㅠㅠ 내 쌀국수.....

따끈한 국물을 기대했는데, 전혀 엉뚱한 게 나온 거다. 메뉴판에 소고기 쌀국수라고 되어 있어서 당연히 우리가 아는 그 국물 쌀국수일 거라 생각한 건데, 나온 건 볶음 쌀국수였다. 그래도 사실 맛은 있었다. 같이 나온 치킨라이스도 중국식 볶음밥처럼 익숙한 맛이라 맛이 있었다. 국물은 없었지만 배부르고 맛있게 먹었다.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이제 다시 'Brisbane' 사진을 찍어볼까? 오~ 밤이 되어 조명이 켜지니 낮보다 오히려 훨씬 멋져 보였다.

이때다 싶어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중간에 비도 잠깐 왔었는데, 비를 피했다가 그치면 또 가서 찍고 또 찍었다. 누가 보면 우릴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을 거다. 누가 봐도 똑같은 사진인 것 같은데 그 똑같은 사진을 수 십장 찍고 있으니. 이건 집착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다... ㅎㅎ 그래도 낮보단 훨씬 예쁜 사진을 건졌으니 우리끼리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럼 된 거지.

우리가 원하던 사진도 찍고 비도 그치고, 기분 좋게 다시 공원 산책을 하다가 그 유명한 인공 비치로 갔다. 그냥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있었는데, 인상이 좋으신 여자분이 우리한테 다가와서 말을 건다. 여기 인공비치에 한 번 들어가서 즐겨보란다. 저녁에는 온수풀로 되어 있어서 춥지 않고, 샤워장도 다 무료라며. 수영이 어려우면 발이라도 꼭 담가보라고. 낯선 이방인에게 먼저 다가와서 이렇게 친절한 호의를 베풀어 준 그분 덕분에 오늘 있었던 모든 불운이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물놀이를 하고 있는데 발을 담그는 게 기분 나쁘지 않을까 싶어서 망설였지만 현지분이 괜찮다고 했으니 발을 물에 살짝 씻고 들어갔다.

"와~ 물이 진짜 따듯하구나!"

"이상하게 기분이 점점 좋아져~~~ ㅎㅎ "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가족들끼리, 친구들끼리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여유롭고 행복해 보여서 보고 있는 나까지 기분이 행복해졌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 야경을 바라보며 무료 페리 타기! 갑자기 비가 내려서 오래 타진 않았지만 사우스뱅크 파크에서 할 건 다 한 기분이라 뭔가 뿌듯했다. 오늘 하루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일들이 생기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이 이리도 행복하니 나에게 브리즈번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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