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결혼식, 짧은 이틀간의 서울여행
얼마 전,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서울에 갔다. 마침 청소년 동계올림픽으로 수영장도 휴관이라 서울에서의 볼일을 좀 몰아서 보려고 호텔도 예약했다.
여유로운 일정으로 중간에 비는 시간은 늘 그렇듯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일로 시작됐다. 학생 때 알바를 했던 대학로 근처를 배회하기도 하고 옛 회사 근처인 종로 일대도 걸었다. 강릉으로 이주를 한지 벌써 5년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서울에 많은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몇 년 사이 제법 많이 늘어난 지하철 노선들이다. 예전에 친구가 “여기도 전철 들어오면 좋겠다.”라고 하는 말에 ”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라고 받아친 일이 떠올라 새삼 격세지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들린 종로5가역도 몹시 깨끗해졌다. 순간 잘못 내렸나 생각했다. 회사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종로 5가 4번 출구로 나와 102번 버스를 타곤 했다. 지금은 그 위치의 버스정류장은 사라졌고 자전거 대여소가 생겼다. 20대 첫 이별을 경험하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버스를 기다렸던 곳도 여기고 생애 첫 전시의 오프닝 파티를 마치고 감격의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리던 곳도 여기였다. 이젠 세월에 묻혀 내 기억에만 자리 잡는구나-하는 마음에 아쉬움이 들었다.
숙소는 웨딩홀 근처 토요코인 호텔로 잡았다. 보통 서울에서 묵을 땐 10만원 미만의 호텔을 찾아보는데 토요코인은 처음이었다. 예전 회사 사장님과 일본출장을 갈 때 자주 묵었던 숙소다.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호텔은 일본 특유의 몹시 아담하지만 쓸데없는 감성은 배제한 군더더기 없는 공간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10년 전 회사 출장의 추억과 겹쳐 더 그랬던 것 같다. 창밖엔 영등포 고가차로의 야경이 펼쳐졌는데 난 여전히 추억에 잠겨, 당장 호텔 밖으로 나가 요시노야에 들어가 소고기덮밥을 시키고 생맥주 한잔을 들이켜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앞으로 서울에 올 일이 있으면 자주 이 호텔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결혼식장에 갔다. 대학 동창인 형이 결혼을 했다. 오래전부터 연애나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서로 열변을 토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던 우리였는데 형이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우리 대화의 큰 화두가 사라지게 되었다. 기쁜 마음보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늘 답 없는 얘기뿐이긴 했어도 형과 술 한잔 하는 시간이 내겐 꽤 즐거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예식장 입구에서 동창생 후배 두 명을 만났다. 참 오랜만이었다.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얼굴도 말하는 투도 모두 그대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 친구는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또 한 친구는 가게를 수년간 운영하다가 최근에 새로운 계획을 도모하는 중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는 이제 막 워킹맘으로의 활발한 활동을 준비 중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또 다른 친구는 오직 일만 생각하며 열심히 달려온 친구였다. 해외에서 수년간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 가게를 차렸는데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아 폐업 후 휴식 중이라고 했다. 또 새롭게 무얼 하고 싶냐는 나의 질문엔 “이제 그냥 월급 받으면서 일하고 싶어요. 더 저지르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자조적이거나 냉소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되려 자신이 꿈꿨던 것을 충분히 실행했고 그 결과를 확인했다는 만족감이 엿보였다. 어쩌면 그녀의 당당하고 진취적이었던 수년간의 과정을 알았기 때문에 내 눈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한 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꿈을 꾸었던 둘이었지만 이제는 바라보는 방향도 방식도 전혀 다르다는 것이 참 흥미로웠다. 문득 이 둘을 바라보며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난 본 적 없는 영화라 내용은 모르지만, 두 사람이 삶을 대하는 방식이 어딘지 그 제목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의 나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같은 곳에서 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제각각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는 슬픈 일이라고도 하지만 난 그런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나이가 드는 일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과거의 자신을 지우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내 경우에는 자신의 타고난 장점들은 잘 간직하고 가꿔나가면서 미래를 구상해 나가는 모습의 사람들이 많다.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임을 알기에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겐 그만큼의 애틋함이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하루하루를 멋지게 견뎌냈고 여태껏 살아냈다는 사실의 동질감과 연민 때문일까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도 어딘지 가슴이 꽉 찬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돌아가서 돌보고 사랑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작게는 집 창문에 물을 줘야 할 화분들, 밥을 주고 산책시킬 강아지들, 운영하고 있는 공간, 사랑하는 아내와 우리 가족, 친구들까지... 결국 모든 게 나를 움직이고 작동하게 하는 에너지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빠른 변화 속에 더러 나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 이 들 때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나인 것이다. 물처럼 흘러가는 스스로를 좀더 흥미롭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이렇게 짧은 기간의 소회를 비교적 세세하게 적어보는 이유는, 단 이틀이라도 새로운 생각이나 감각을 일깨우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이 놀라워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