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시즌이 막을 내리고 있다. 지인들이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다양한 언어로 적힌 기념품도 속속 도착중이다.
럼이 든 노르웨이 초콜릿, 감기 걸릴 때 먹는 독일 차, 스프레이처럼 바르는 일본 썬크림, 달콤하고 쫀득한 베트남 말린 망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달한 호주 팀탐.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세계 시민이 된 기분이다. 여름 내내 간식이 끊이지 않는다.
예전엔 나만 해외여행을 가는 것 같았는데 요즘엔 나만 해외여행을 안 가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난다는 지인 말을 들으면 내 마음도 설렌다. 그곳에서 어떤 풍경에 감탄하고 놀랄지 궁금하다.
여행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으면 질문이 많아진다. 뭐가 제일 맛있었어? 뭐가 제일 재밌었어? 뭐가 제일 낯설었어?
몇 번이나 가본 나라도 지인의 여행담을 듣다보면 당장이라도 가고 싶어진다.
일상을 잠시 벗어나 낯선 공간에 발을 디디려면 결단이 필요하다.
돈을 쓰겠다는 용기, 짐을 꾸리겠다는 마음가짐, 정보를 찾겠다는 열정, 불편과 귀찮음을 감수하겠다는 다짐, 새로운 환경에 부딪쳐 보겠다는 도전정신이 있어야 한다.
나는 늘 머무르기 보다는 떠나는 사람이고 싶었다.
새로운 도시를 원했고 그곳에 정착하고 익숙해지면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떠나기 어려운 상황일 때는 여행을 통해 아쉬움을 달랬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들을 때마다 외로움과 자유를 동시에 느꼈다.
방랑자로 살고 싶은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간절해진다.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떠나는 사람이다.
100편의 여행 에피소드를 엮어 만든 <방랑자들>의 책 제목처럼, 그녀에게는 한곳에 뿌리내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유전자가 없다. 저자는 고백한다.
‘ 내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 버스의 진동, 자동차의 엔진 소리, 기차와 유람선의 흔들림. 나는 웨이트리스였고 고급 호텔의 청소부였고 유모였다. 책을 팔기도 했고 표를 팔기도 했다. 약간의 돈이 모이면 곧바로 여행길에 올랐다.’
<방랑자들>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책이다.
에세이와 짧은 소설, 단상, 편지들이 두서없이 뒤섞여 있다. 저자뿐 아니라 다양한 인물이 화자로 등장한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픈 아들을 돌보다 불현듯 집을 떠나 지하철 노숙자로 사는 여인, 쇼팽의 심장을 숨겨 폴란드로 돌아와야만 했던 누이, 유람선 여행을 떠났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그리스 전문가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작가는 이동하는 인간의 육체에도 관심이 많다. 책에는 인체를 약품에 담가 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등장한다. 인체 전시 박물관을 찾아다니는 화자도 있다. 또 다른 종류의 탐험이다.
이 책은 중요한 일에 매진해야 할 때 읽으면 안 된다.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거나, 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무언가에 집중해야 할 때 펼치면 끝장이다.
읽을수록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아련하고 막막한 기분이 든다.
이 책은 마음이 붕 떴거나 마음잡을 길 없을 때 읽으면 좋다.
합격 결과를 기다리고 있거나, 시련을 당했거나, 사랑에 빠졌거나, 여행을 떠나기 전이거나, 여행 중이거나, 봄바람이 불거나, 낙엽이 떨어질 때 읽으면 좋다.
그러므로 이 책을 다시 꺼내든 건 현재 내 마음이 둥둥 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언젠가는 이중 한 곳에 오래 머물러야만 한다는 사실을 도시들을 지나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다 어쩌면 거기에 정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나는 마음속으로 도시들의 비중을 가늠해 보고 비교해 보고, 또 평가를 내린다. 내게는 항상 그것들이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