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을 증폭시키는 SNS와 인터넷
몇 년 전, 한 지인이 SNS 친구를 소리 없이 끊으셨다. 그에 대한 포스팅이 몇 달째 내 타임라인에 보이지 않자, 그분 페이지에 직접 방문해 보았고, 역시나 예상대로 친구 관계가 끊겨 있었다. 얼마 후, 직접 만나 술자리에서 “왜 저랑 친구 끊으셨어요?”라고 물으니, 그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알다시피 내가 너랑 정치 성향이 완전히 정반대잖아. 네가 ‘좋아요’ 누르는 게시물들이 자꾸 내 타임라인에 뜨는 게 거북해서 아예 끊어버렸지.”
그 얘길 듣고 나니, ‘SNS를 통한 정보 재생산 활동은 이렇게 덧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SNS라는 것은 개인의 성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극히 개인화된 매체였다. 나처럼 평범한 이들에게 팔로워들이란 가족, 친구, 학교나 직장 선후배처럼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고, 조금 저명한 작가나 셀럽들의 경우, 그들의 스타일이나 생각, 가치관을 추종하며 동조하는 집단일 테니 말이다.
이는 언론사나 매체, 브랜드, 정당에서 운영하는 페이지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인터넷 상에 팔로잉이나 구독을 하는 행위들은 능동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종류의 정보원만 취사선택할 수 있다. 특히, 요즘 SNS의 강점은 Customization(개인화)인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내 타임라인에는 내 입맛에 맞는 정보들만 뜨게 되고, SNS 자체적인 추천 알고리즘에 의해 내가 구독하지 않은 정보라 하더라도 내 평소 취향에 부합하는 뉴스나 포스팅이 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SNS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는 행위는 점점 더 편협성을 띠게 마련이다. ‘좋아요’를 누를수록, 구독하는 페이지가 많을수록, 그 유저의 성향은 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럴수록 그 사람이 싫어할 만한 논조의 기사나 토픽들은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된다. 흔히들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최신의 정보를 얻는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류의 정보처리가 절대 건강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확증편향]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현상인데, 정보의 객관성과는 상관없다. (출처: 한경 경제용어사전)
확증편향은 지금과 같은 인터랙티브 미디어 시대에 더 잘 발견된다. 타인과의 교류 없이 스스로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찾고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질감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SNS의 공유를 통해 그러한 생각들은 쉽게 칭찬받고 동조받는다.
대표적으로, 유튜브를 통해 가짜 뉴스를 접하는 어르신들의 사례가 그렇다. 이런 식의 뉴스를 접하는 어르신들의 경우 소위 많이 배우신 ‘식자층’도 적지 않은데, 그들이 처음부터 유튜브의 공신력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뉴스들을 주로 시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명제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유튜브에는 그들의 가치관에 확신을 불어넣는 콘텐츠가 녹아 있었기에 그들은 열광한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지 않는 공신력 있는 매체의 보도는 의도적으로 차단하며, 옳다고 믿는 텍스트만 골라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했던 것이다.
검색은 능동적인 정보처리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가설의 부합하는 근거를 찾는 행동에 그칠 뿐이다.
그렇게 뉴스의 신뢰성과 진실을 떠나 정보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SNS와 인터넷 검색에 의존하는 젊은 층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독과 검색에 의한 정보 소비는 어느 정도 개인적인 취향에 편중될 수밖에 없고, 편협한 시각을 낳으며, 검증된 진실보다는 타깃 정보 소비층들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들만이 살아남는 구조를 만들 수밖에 없다.
정치인을 포함한 유명인들의 SNS 계정도 마찬가지이다. 팔로워들의 대부분은 동조하는 지지자들이고, 그들에 의해 우호적인 댓글과 ‘좋아요’가 형성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SNS와 인터넷은 다양한 생각이 모인 ‘광장’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유명인의 페이지나 커뮤니티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동조받고, 자신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쉽게 배척한다. 일례로 똑같은 이슈를 다룬 조선일보의 기사더라도 ‘다음’ 포털에 걸린 것과 조선일보 웹사이트에 걸린 것의 댓글 성향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처지와 논리에 부합하는 콘텐츠와 미디어에 끌리고, 그 안에 안주한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다. 과거에는 매체의 선택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메시지들이 존재했지만, ‘개별 유저의 선택’을 통해 정보를 수용하는 요즘 세상은 정보의 편식을 조장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인터넷을 통해 최신의 정보를 언제 어디서나, 빠르고, 많이 습득한다고 착각한다. 실상을 보면, 감정적이고 근거 없는 동조, 귀에 달콤하기만 한 영양가 없는 위로, 자기 생각을 확신하게끔 만드는 편향된 정보들이 넘쳐나는데 말이다. SNS와 검색창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들은 조금 멀리하고, 책을 펴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