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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Apr 08. 2019

별 헤는 밤

Rap도 결국 한 편의 詩야.


 얼마 전,

 출근길에 노래 한 곡을 듣다가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고등래퍼3>에서 윤현선, 김민규 학생이 부른 <별 헤는 밤>을 들으면서였다. 때로는 담담하게 읊조리는 뼈아픈 고민이 더 슬프게 다가오는 법이다. 이들의 곡에는 강렬한 비트도, 관객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내는 후렴구(verse)도 없었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의 생각을 담백한 플로우와 정확한 딕션으로 또박또박 풀어냈을 뿐이었다.


난 별을 봐도 똑같아.
외로워 힘들어.
나도 별을 봐도 똑같아.
부러워 힘들어.

못 박힌 엄마의 마음에게는 내가 별인데
도대체 빛나지 않네
어둡게 했네.
미안해 엄마 힘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난.

겨울 지나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는데
내 옆에는 아무도 없던데
떠오르고 싶어 저
하늘로 우리들은 별
쓸쓸하긴 싫어
혼자 외롭기 싫어.


 간절히 원하는 일을 위해 자퇴를 결심하지만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마음 아파하고(윤현선), 힙합 크루에 소속되어 래퍼의 길을 걷지만 학교 밖의 10대로서 세상의 편견과 싸워가는(김민규) 그들의 모습. 고작 열여덟 살짜리들도 자신의 편이 아닌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데, 왜 나는 이 친구들보다 두 배나 나이를 더 먹고도 한 줌 알량함 때문에 세상에 주먹 하나 지르지 못하는가. 이런 먹먹함이 밀려들었다. 그 먹먹함은 감수성 충만하던 나이에 교과서에 실린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읽고도 느끼지 못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작년인가 재작년쯤, tvN <알쓸신잡>에 출연한 김영하 작가의 발언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작권이 있는 작품이라도 교과서에는 자유롭게 실을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작품이 실리는 것은 반대한다고 했다. 교과서에 자신의 작품이 나오는 것은 꽤나 자랑스런 일일 텐데 왜 굳이 거부했을까?


단편 소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 작품의 특성상, 잘라서 실리게 되면 작품의 본래의 의도가 훼손됩니다. 또한, 문학작품이란 독자들이 읽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기감정을 발견하고 타인을 이해하도록 설계된 것인데, '조각난 내용 속에서 단순히 답을 찾는 방식'으로 문학작품이 읽히는 것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유희열, 유시민, 황교익 등 함께 출연한 패널들도 김영하 작가의 의견에 공감하며,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다. 누군가는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고르시오."라는 시험 문제를 해당 작가가 맞히지 못했다는 일화를 예로 들었다. 작가의 주관적 문제의식을 작품에 녹여낼 수는 있겠지만, '작가의 의도'란 칼로 무 자르듯 명제화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비단 소설이 아닌 시(詩)에서도 나타난다. 소설에 비해 분량이 짧기 때문에 시는 교과서에 전문(全文)이 실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시문학 교육은 감수성 배양에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 시를 갈기갈기 찢어 해부하고, 획일화된 심상을 강요하는 데에 그 폐해가 있다하겠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처음 배웠던 김영랑 시인의 <돌담에 떠오르는 햇발>이라는 시를 기억한다. 제목 그대로 돌담에 떠오르는 봄 햇살을 노래한 이 2연 8행짜리 시에 대해, 선생님은 이 시의 분위기가 음악적이고, 낭만적이고, 감각적이며, 내재율을 가진 시라고 설명하셨다. 이 시를 음미하며 새악시 부끄러움을 연상하기 전부터, 나를 비롯한 열네 살짜리 중학생들은 메스를 들어 시를 기계적으로 해부하는 것부터 배운 것이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6년을 다니는 동안 교과서에서 백 편 이상의 명시들을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욀 줄 아는 시는 하나도 없다. 그중에는 이육사의 <청포도>가 있었고, 한용운의 <임의 침묵>도 있었으며, 이상의 <거울>도 있었다. 대신, 드문드문 파편화된 기억 속에, '공감각적 심상', '시적 허용', 같은 개념들이 떠오른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푸른 종소리'(김광균, <외인촌>)는 공감각적 심상의 대표적인 구절이고,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조지훈, <승무>)는 시적 허용을 묻는 문제의 단골 소재였다. 하지만 이 시들의 전체적인 감상이 어땠는지 떠오르는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갈기갈기 해부당한 詩의 슬픈 운명이여





그러나 겨을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일홈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 할게외다


 한국 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나는 이 시를 고교 시절 문학 시간에 세 시간에 걸쳐 배웠다. 물론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주제 의식과 밤하늘을 바라보며 노스탤지어를 그리는 시인의 마음은 무척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시를 보면, 더운 여름날 찜통 같은 교실에서 개량 한복을 입은 문학 선생님의 해설을 영혼 없이 받아 적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왜 우리는 래퍼들의 랩에 열광하는가. 조금만 살펴보면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함축성과 음악성, 이 것들이 시와 랩 모두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언어가 리듬을 타고 마음에 팍팍 박혀 감동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이 둘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렇기 때문에 래퍼들은 모두 시인이며, 랩에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 역시 시를 읽고 한 폭의 그림을 마음에 그릴 수 있는 영혼을 타고났다. 다만 이러한 능력을 제대로 배양할 수 있도록 올바르게 훈련받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담은 자작 시 한 편으로 부족한 글을 맺을까 한다.



시적 허용, 외형률이 다 무슨 말이오
작가의 의도가 대체 뭣이 중헌디

시 한 수 통째로 음미하지 못하고
한 구절 해설
그다음 한 구절 또 밑줄

중학교 삼 년
고등학교 삼 년

교과서에 실린 기 백 편
가슴에 꽂혀 욀 줄 아는 것 하나 없는데

고등국어 세 시간
갈기갈기 해체했던
윤동주 ‘별 헤는 밤’ 보다

고등래퍼 지난밤
자퇴생 김민규 삼십 초 지껄임이
내겐 더 벙벙한 울림 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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