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tergrapher Jan 16. 2020

자녀 없는 노년에 대한 상상

당신의 ‘감성’ 노후 대책은 안녕하십니까.


스물세 명이 미소 짓고 있는 가족사진


 할머니 댁 거실에는 70세 생신을 맞아 촬영한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이 사진 속에는 총 23명의 인물들이 있다. 그 사이 나와 사촌들이 결혼을 해서 또 아이를 낳았으니, 지금 다시 찍는다면 서른 명은 족히 모이게 될 것이다.


 올해 미수(88세)를 맞으신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포함하여 총 5남매를 두셨다. 할머니의 다섯 자녀가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중 다섯이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가 생겼다. 그래서 3년 전 할머니 85회 생신 때는 직계 가족들만 모아도 제법 큰 장소를 예약해야 했다.


 우리 세대가 기억하는 조부모의 모습은 위에 서술한 우리 할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5-60년대에 출생한 우리 부모 세대는 보통 넷 이상의 형제들과 자랐기 때문에 그들이 한 두 명의 자녀만 두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큰 가족을 이룬다. 우리 세대의 사촌은 최소 10명 이상이며, 그 때문에 명절이면 북적북적했던 기억을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서로 소원해지긴 했어도 집안 행사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촌 형제들을 보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릴 때 동네에 유행했던 역병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젊은 시절에 전쟁을 겪긴 했지만 할머니는 당신 인생이 나름 행복했다고 추억하신다. 열심히 일해서 재산도 불리고, 자식 다섯 모두 자리 잡아 잘 살고 있으며, 손자 손녀들도 하나 같이 바르게 자랐기 때문이란다. 이제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고 하루 이틀 앓다가 하늘나라 가시는 것이라 마지막 소원이라는 말씀하시는 할머니.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할머니는 30여 명의 후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으실 것이다.


 젊은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노년의 삶과 임종의 순간은 저런 모습이 아닐까. 노인이 되어도 거동이 크게 불편하지 않고, 마음 편히 지내다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가는 것. 그런데 많은 가족들 틈에서 세상과 작별하는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찾아보지 못할 것 같다.


 할머니로부터 한 세대 내려와 보자. 나의 부모님은 57년 닭띠, 올해 64세가 되셨다. 국민연금을 수령하실 나이지만 다행히 등산과 수영을 무리 없이 하실 정도로 건강하시다. 가족계획 시대에 결혼한 부부들이 대개 그렇듯 우리 부모님도 나와 남동생 이렇게 둘만 낳으셨다. 지금 우리 형제는 둘 다 결혼해서 각각 자녀 하나씩을 두고 있다. 동생네는 하나만 낳기로 결정한 것 같고, 우리 부부는 아직 고민 중이다. 하지만 나이도 있고 해서 하나 더 낳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


 부모님이 70세를 맞아 할머니 댁에 있는 것과 똑같은 가족사진을 찍는다면 그렇게 복작복작한 모습이 연출될 수 있을까. 여전히 화목한 모습이겠지만 사진 속에는 불과 8명만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 세대 내려와 내가 가족사진을 찍는다면 그 수는 5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와 딸, 아니면 우리 부부와 아이가 없는 딸 부부, 운이 좋다면 우리 부부와 딸 부부, 그리고 손자나 손녀 한 명 정도일 것이다.


 일반적인 임종의 모습도 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12년 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사진에 있는 모든 가족들은 물론, 아버지의 사촌들과 그의 자녀들까지 많은 수의 가족들이 와서 애도했다. 수 십 년 후에 내가 죽을 땐 누가 찾아와 병상 맡에서 슬퍼해 줄까. 우리 딸, 어쩌면 사위와 손자녀, 넓게 보아야 조카 한 두 명 정도지 않을까.




 주변에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갖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유는 나름 합리적이다. 부족할 것이 없는 나의 인생에 아이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며 얻는 보람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가꿔 나가겠다는 선택을 존중한다. 그건 부모 세대에 비해 많은 교육을 받고, 적은 형제들 틈에서 부족하지 않게 살아왔던 우리 세대가 내린 합당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까지나 젊을 수만은 없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 환경은 변하고, 추구하는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10대 후반에는 대학만 가면 끝일 줄 알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열아홉 살에는 모의고사 1, 2점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지만, 서른여덟에는 내가 보고 있는 동네의 아파트 시세 1, 2천에 전전긍긍한다. 쉰일곱, 일흔여섯 살에는 무엇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간절할지 모른다.





할머니는 편찮으실 때면 고독을 호소하신다.


 사실 처음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젊은 시절, 통/반장을 도맡아 하실 정도로 사교성이 좋으셨던 할머니는 여전히 노인대학에서 ‘왕언니’로 통하며 많은 친구들을 갖고 계시다. 생신 때 내려가면 친구분들의 축하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할머니의 자녀 다섯 중 셋이나 근처에 살면서 자주 안부를 살피고 계시지 않은가.


 그런데도 할머니는 이따금 고독을 호소하신다. 밤에 깜깜한 방에 누워 밀려드는 통증과 노화의 공포를 혼자 이겨내시는 게 괴로우신 것이다. 이러한 고독함과 쓸쓸함을 누가 이해하고 같이 아파할 것인가. 친구? 이웃? 결국 가족 간의 정으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 이후로 사나흘에 한 번 드리던 전화를 매일 드리고 있다. 할머니 휴대폰으로 우리 딸 사진도 더 자주 보내드리니 좋아라 하신다.


 젊은 우리는 아직 잘 모른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부양해줄 사람이 없어 빈곤한 상태에서 사망하는 것을 ‘고독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노후 대책은 모두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논의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아이를 포기하는 대신 더 탄탄한 자금 관리와 건강 유지를 통해 우리의 70, 80대는 부모님 세대보다 더욱 안정적인 노년을 보낼지도 모른다. 아마 더욱 발전한 의료 기술과 과학 기술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가를 즐기는 데 부족함 없는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든 인연은 언젠가 제각기 수명을 다하기 마련이다. 물론 지금은 젊기 때문에 부모님도 계시고, 형제들도 있고, 연인이나 배우자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부모님은 먼저 떠나시고, 형제와 배우자도 우리보다 앞서 이별을 고할지도 모른다. 청년기까지의 가족은 어른들과 나였다면, 노년기의 가족은 나와 자녀, 손자녀들이다. 자녀가 없어 노년에 혼자된다면, 누구와 마음을 터 놓으며 인생의 종착역까지 가는 고독한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당신의 ‘감성노후 대책은 안녕하십니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꼭 그런 걸 가족과 나누어야 하냐고. 친구들과 잘 지내며 같이 나이가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생각해 보자. 지금 30대인 당신에게 가족은 아무도 없고 오직 친구들만 남았다고 하면, 당신은 외롭지 않을 것 같은가? 하물며 몸도 따라주지 않고, 정기적인 사회활동도 거의 않는 노년에는 어떨 것인가.


 자녀로 인해 자신의 삶을 양보하기 싫었던 당신은 ‘딩크’와 ‘욜로’를 선언하며 수 십 년을 살아왔다. 덕분에 젊어서 여행도 많이 다니고, 육아로 인한 고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경제적인 여유까지 생겼지만, 명절에 찾아올 젊은이 한 명 없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 어느새 임종이 가까워져 병실에 입원했을 때, 사경을 헤매는 당신 머리맡에 나타난 사람은 담당 주치의와 변호사뿐일지도 모른다.




 적은 수의 형제자매 가운데 태어나, 집안의 많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 해왔던 우리 세대는 축복받은 유년기를 보내왔다. 그렇게 받은 큰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커왔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녀의 필요성을 절실히 못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옆에 있을 것 같고,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해 경제적인 여유와 건강만을 유일한 조건으로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물질적인 안정만이 행복한 여생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쁨과 슬픔을 같이 공감하며, 고독한 노년의 길을 배웅해줄 수 있는 가족의 존재가 이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단지 ‘오늘의 나’를 위해 자녀 계획을 보류하고 있다면 한 번쯤 재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갖지 않는 세태에 대한 사견을 담아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다른 관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어볼 생각입니다.

** 저와 아내는 난임부부였습니다. 아내에게 이 글을 공유했더니, 우리 같은 난임부부들이 이 글을 보면 더 슬플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고 있는 많은 부부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꼭 엄마 아빠가 되어 노년까지 서로 의지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통의 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