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tergrapher Feb 10. 2020

마음속의 북극성

사소한 투닥임에 지칠 때 쓱 올려다보면 되는


 팔 년은 된 일인 것 같다. 평소에 내가 참 좋아하던 다섯 살 위의 형에게 회사생활이 녹록지 않다고 상담을 청한 적이 있었다. 형은 그때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태원아, 내가 요즘 느끼는 건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일이 제일 바쁘고 중요한 줄 알아서 다른 사람과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라 스트레스받는 일은 자주 일어나. 그래서 꿈을 아주 크게 가지고 뭔가 그것을 위해 분명히 하고 있어야 해. 그러다 보면 주변에서 치근덕거리며 쑥덕대는 사람들과 그런 일들이 한없이 작고 우스워 보일 거야."


 그때는 지금 당장 힘든 것만 알았지 ‘꿈을 크게 가지면 주변의 잡음들이 사소하게 느껴진다’는 형의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다. 그냥 지금 꼬여 있는 일의 원인이 나 아닌 저 사람한테 있는 것만 같고,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함부로 지껄이는 사람들에게 상처 받던 시절. 꿈은커녕 하루하루 싸워나가는 것만으로 허덕이는 나에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해준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있는데, 기억 속에 놓아두었던 형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내가 작가로 등단한 게 1979년인데, 그 무렵에도 아직 그런 좌표축은 문학계에서 상당히 견고하게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즉, 시스템의 ‘관례’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건 전례가 없다’ ‘그게 관례다’라는 식의 말을 편집자에게서 자주 들었습니다. 나는 작가란 제약 따위 없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직업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이러지?’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원래 분쟁이나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러한 ‘관례’나 ‘문학계의 불문율’을 거스르겠다는 식의 의식은 딱히 없었습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서 어렵사리 이렇게 소설가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나가자고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습니다.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해나가면 될 것이고 내 쪽은 내 쪽 대로 해 나가면 된다. 나는 1960년대 말의 이른바 ‘반란의 시대’를 뚫고 나온 세대의 사람이라서 ‘체제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의식은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라고 할까, 그보다는 우선, 그래도 명색이 표현자의 말단으로서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내게 맞는 스케줄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로 쓰고 싶다, 그것이 작가인 내가 가져야 할 최저한의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그 개략은 처음부터 상당히 확실했습니다. ‘아직은 잘 쓰지 못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붙기 시작하면 사실은 이러저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합당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항상 하늘 한복판에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의 지금 서 있는 위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잘 보였습니다. 만일 그런 정점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곳곳에서 상당히 헤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中, 무라카미 하루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이 동시에 교차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직진만 할 수는 없다. 갑자기 나타나 길을 되돌아 가라는 사람도 있고, 옆에서 빠른 속도로 튀어나와 나를 밀쳐내는 사람도 있다.


 내 목소리만 높이며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없는 조직생활도 마찬가지다. 내 입장이 있듯, 유관 부서 박 과장의 입장도 있고, 나의 상사 김 부장이 얻고자 하는 크레디트는 또 다르다. 그럴수록 우리는 마음속의 북극성을 생각해야 한다. 전혀 생산성이 없어 보이는 보고자료에 숫자를 채우는 일을 하고 있더라도, 거래처와의 즐겁지 않은 술자리에 앉아 폭탄주를 마시고 있더라도, 갑질 하는 부서의 전화를 받더라도, 우리는 마음속의 북극성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할 나의 북극성에 비하면 이들은 부싯돌의 투닥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며 어쩔 수 없는 일들. 뜬구름 잡는 보고서를 쓰거나, 관리부서에서 취합이라는 명목 하에 보내는 자료들은 그냥 하고 치워버리면 된다. 회사원인 우리에게는 그런 업무들이 하루키가 말하는 ‘관례’나 ‘시스템’ 일 것이다. 굳이 쓸 데 없는 정의감을 불태우며 취합 담당자와 싸울 필요도 없다. 그냥 힘을 빼지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대응해주며, 나머지 시간에 북극성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옳다. 어차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조직과 사회에서의 변화는 너무나 굼뜨게 일어난다. 그런 것들에 일일이 맞서 싸워 나가며 푸념만 하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짧다. 




 팔 년 전, 형에게 푸념했던 나는 모든 관계, 모든 일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3년 차 어린 사원이었다. 나는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왜 당신은 모르는가. 나는 정말 코어 업무에만 집중하려 하는데, 왜 이리 쓸데없어 보이는 잡무는 그리 많은가. 또 의미 없이 소모적인 회식은 왜 또 이렇게 많은가. 그렇게 불평불만하면서도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마음에 혼자 상처 받고, 혼자 분노했던 것 같다. 어쩌면 적당히 내려놓을 수 있는 요령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이 내게 해주었던 말과, 하루키의 메시지는 결국 ‘너의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즉, 사소한 일과 소모적인 관계에 집착하지 말고,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새기고 삶에 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매일 실천해야 할 삶의 자세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30대 후반의 흔한 소개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