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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9. 2019

집을 떠나기로 한 가장 큰 이유

창문을 활짝 열어두는 사람들 15화


메타, 축하해 줘. 드디어 온전한 내 공간이야. 진짜 내 집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사는 동안은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살 거니까 결국은 내 집인 거야. 미리 준비할 게 있을까 했는데, 벽도 바닥도 깨끗해서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었어. 책상이랑 옷장은 조립식이 저렴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사 왔는데 저걸 어느 천년에 만들고 있을지 모르겠네. 큰돈 들여 산거라고는 이십만 원짜리 중고 냉장고 하나뿐이야.


아, 그 너덜너덜한 소파 있잖아. 결국 그것까지 데려온 거 있지. 메타, 우리 집에 오면 항상 그 자리에 앉아있었잖아. 자주 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 방 안에 있는 메타의 공간이라고 하면 그 소파가 가장 먼저 떠오르니까. 도저히 두고 올 수가 없었어. 아빠랑 헤이즐넛 아줌마는 왜 새 집에 쓰레기를 가져가냐며 혀를 찼지만 그들은 나와 메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거야. 항상 그렇다니까.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뿐이야.


텅 비었을 때는 꽤 넓다고 생각했는데 가구 몇 가지가 들어왔다고 방이 반토막이 됐네. 아참, 진진이 이사 선물로 커피 메이커를 사 왔거든. 빨리 써보고 싶어서 집 근처에 커피랑 여과지 파는 곳을 찾아서 돌아다녔는데, 동네 느낌이 뭐랄까, 허름하고 아늑한 게, 딱 예술가들이 모여사는 곳 같아. 카페도 까마득히 걸어야 겨우 하나 보일 정도야. (이렇게나 아무것도 없는 동네라니, 정말 예술에 전념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커피가 다 내려져서 잠시 다녀왔어. 내 공간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이라니 항상 꿈꾸던 일인데 막상 현실이 되니 실감이 잘 안나네. 이 곳에서 처음 메타에게 쓰는 글이니까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적고 싶은데 어떤 이야기를 적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사실 짐을 정리하면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두 가지 물건이 소파와 이 노트였거든. 내가 집을 떠나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메타와 나를 분리시키기 위한 거였잖아.


물론 이제 나는 스물일곱이고 충분히 아빠를 떠나서 살 나이가 되었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집을 떠나기에는 동기부여가 조금 부족했달까. 뭐, 돈이 없으니 모험을 할 용기가 부족했다는 말이 더 맞겠지. 아빠의 새 애인 컬렉션을 구경하는 일보다, 메타가 나를 떠난 게 더 큰 동기부여가 된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랬어. 가족은 내 선택 밖의 일이지만 메타와 나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관계잖아. 그걸 분리시키는 데에도 어떤 결단이 필요할 것 같았어. 어쩌면 메타는 이미 본인의 몫을 다 해낸 것일지도 모르겠어. 이번엔 내가 뭔가 해야 할 차례인 거고.


아직 모든 게 낯설고 적응이 잘 안돼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나에게, 정말 오랜만에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하루였거든. 여전히 메타가 깃든 소파에 앉아서 이런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이것까지 그만두라고 하는 건 좀 곤란하니까 그냥 넘어가 주라.




글. 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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